
미국 조지아주 애틀랜타 하이 뮤지엄(High Museum of Art)의 현대미술 수석 큐레이터 마이클 룩스(Michale Rooks)는 8년 전 지인이 보내준 링크를 통해 온라인에서 한 한국 화가의 작품을 봤다. 이름도, 나이도 모르던 작가의 그림이었지만, 생동감 넘치는 작품에 끌렸다. "처음엔 당연히 젊은 예술가의 그림이라고 생각했죠. 에너지가 넘치는 동시에 굉장히 현대적으로 보였거든요."
그는 '설악산의 화가' 김종학(88)의 작품을 처음 본 순간을 이렇게 회고했다. 하지만 "화가가 30대가 아니라 80대라는 사실을 곧 알고 놀랐다"는 그는 "이후 한국을 찾아 화가를 만나고, 수장고를 찾아가 60년 가까이 작업해온 것을 보고 더 놀랐다"고 말했다. 이후 그는 기회가 닿는 대로 한국을 찾아와 국립현대미술관 도서관에서 자료를 찾았고, 설악산에 직접 가보며 '화가 김종학'을 알아갔다. 미국에서 처음으로 열린 김 화백의 개인전은 이렇게 시작됐다.
'설악산의 화가' '꽃의 화가'라 불리는 김 화백의 전시 '김종학:설악산의 화가(KIM CHONG HAK:Painter of Seoraksan)'가 지난 4월부터 하이 뮤지엄에서 열리고 있다. 하이 뮤지엄은 미국 남동부 최대 규모의 시각예술 전문 박물관이다. 김 화백 전시는 이곳에서 오는 11월 2일 막을 내린 뒤 내년 애리조나주 피닉스 미술관으로 이어진다.
이 전시는 한국 갤러리가 먼저 문을 두드리지 않고, 미국인 큐레이터가 자발적으로 기획해 작품을 모두 직접 고르고, 예산 승인 권한을 가진 미술관 이사회를 설득해 성사됐다는 점에서 매우 드문 경우다. 한국 미술로는 '단색화'가 국제 무대에 더 잘 알려졌지만 그는 김종학을 먼저 택했다. 해외에서 주목받는 한국 미술의 스펙트럼이 더 다양해지고 있다는 신호다. 잠시 한국을 찾은 룩스 큐레이터를 지난 11일 서울 삼청동에서 만났다.

전시에 대한 반응은.
한마디로 최고(over the top)다. 많은 사람으로부터 '전시가 좋다' '고맙다'는 인사를 받았다. 일부러 가끔 전시장에 가서 관객들을 관찰하는데, 작품의 아름다움에 감탄하는 눈빛을 보곤 한다. 화가 인터뷰가 담긴 15분짜리 영상을 보며 눈물 흘리는 사람도 있었다.
김 화백을 선택한 이유는.
그의 캔버스엔 대담한 아메리칸 팝아트의 감성과 함께 신체의 움직임(제스처)이 녹아든 추상표현주의의 감성도 있다. 수 천 년을 이어온 한국 전통회화의 역사도 바탕에 깔렸고. 특히 그가 그린 산(山)이라는 소재엔 천 년의 역사가 풍부하게 녹아 있다. 그래서 나는 그의 그림을 처음 봤을 때 '와, 이 사람은 정말 똑똑한 예술가이구나' 했다. 그는 전통 위에 지난 50년의 현대 미술사를 다 꿰고, 그걸 독창적으로 표현했으니 말이다.

김 화백은 평안북도 신의주 태생으로 1962년 서울대 미대 회화과를 졸업했다. 1960년대에 추상화를 그렸으나, 1970년대 말 뉴욕을 다녀온 뒤 설악산에 칩거하며 자연을 그려왔다. 추상에서 구상으로 방향을 틀었지만, 추상의 자유로운 정신과 전통회화의 DNA는 산, 꽃과 풀의 찬란한 색채로 남아 있다.
룩스는 "한국 전쟁 후 한국 예술가들 역시 서구 모더니즘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김종학도 서양화를 다양하게 섭렵했으나, 80년대 중반 이후 같은 세대의 예술가들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다"고 말했다. 이어 "그가 다양한 재료와 기법을 실험한 뒤 흐름과 무관하게 자기의 길을 택한 것은 매우 용감했다.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그는 또 "김종학에게 모더니즘은 1950년대 파리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조선 왕조, 한국의 초기 근대에서 시작된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나는 항상 큰 갤러리의 상업적 영향력에서 벗어나 매우 독립적으로 일해왔다"며 "내가 전시를 기획하며 항상 중시한 것은 유명하거나 잘 팔리는 예술가가 아니라 '중요한 작업을 하는' 예술가였다"고 강조했다. 이어 "김종학은 가치 있고 중요한 작업을 했다. 한국에서 많이 사랑받는 화가이지만 한국 밖에서는 그를 잘 모른다. 그래서 꼭 소개하고 싶었다"고 덧붙였다.
70여 점 정도가 나온 전시엔 김 화백의 사계절 회화가 고루 나왔다. 그는 1층엔 가을과 겨울 그림이, 2층엔 봄과 여름의 꽃 그림을 배치됐다. "김종학의 겨울 그림을 특히 좋아한다"는 그는 "그의 겨울 그림들은 정말 놀랍도록 아름답고 명상적이고, 매우 열정적인 표현이 돋보인다"고 말했다.
김 화백의 많은 작품은 설악산에서 그려졌다.
그가 뉴욕에서 그린 그림에서도 내 눈엔 한국의 산과 같은 풍광이 보인다. 한지에 먹으로 뉴욕의 스카이라인을 그린 작품도 있는데, 신기하게도 그 역시 한국의 산처럼 표현돼 있다. 산은 언제나 그에게 중심이었다고 생각한다.


전시에 한국 자수 작품과 조선 목기 등도 함께 소개했다.
작가의 소장품을 보고 나니 전시에 넣지 않을 수 없었다. 한국 민속 공예에 담긴 예술가들의 언어가 그의 언어의 일부가 됐음을 보여주고 싶었다.
한편 그는 도록 제작에도 공을 들였다. 대만계 미술사학자 리사 리(Lisa Lee), 종이 회화 전문가이자 전 뮌헨 박물관장 마이클 젬프(Michael Semff) 등에게 의뢰해 비평을 실었고, 표지엔 '설악산 화가 김종학'을 한글로 함께 표기했다. 도록 1쇄는 이미 소진됐다.
그는 김 화백을 가리켜 "조선 팝(Pop)의 아버지"라고 했다. 음악 얘기가 아니다. 영화, 드라마, 패션, 음식 등에서 옛것과 새것이 결합한 형태로 세계 젊은이들을 사로잡고 있는 한국 문화를 가리킨다. 그는 "아무도 그 길을 가지 않을 때, 한류가 있기 전, 김 화백이 홀로 그 길을 갔다"며 "이 매력 때문에 젊은 관객 반응이 특히 더 좋은 것 같다"고 말했다.
한편 김 화백은 고령으로 하이 뮤지엄 전시를 직접 보지 못했다. 최근에는 지병이 악화해 작업도 중단한 상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