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팝 열풍 속 척박한 한국의 공연 인프라

“작호도(鵲虎圖) 배지 있나요?”
8월의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기념품숍 앞에 긴 줄이 늘어섰다. 박물관 굿즈를 사기 위한 대기 행렬이었다.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K팝 데몬 헌터스(케데헌)’의 인기 캐릭터 ‘더피’를 연상시키는 호랑이 배지가 불티나게 팔린 것이다. 이 콘텐트의 주인공은 현실의 아이돌이 아닌, 가상 걸그룹 ‘HUNTR/X’. 이들의 주제가 ‘Golden’은 영국 팝 차트 1위에 올랐고, 오프라인 굿즈는 품절 사태를 빚었다.
음반 판매서 스트리밍 서비스로
산업 구조 바뀌며 공연 중요해져
공연 산업, 도시 전략 핵심 차지
문화·관광 등 경제 파급효과 커
열악한 서울 공연 인프라 탓에
K팝 아티스트, 해외 무대 선호

지금 우리는 한 가지 결정적인 전환점을 마주하고 있다. 디지털 세상에서 탄생한 콘텐트가 오프라인 공간에서 실체화하고, 팬들은 그 실체를 ‘경험’하고자 몰려든다. 공연장이든 박물관이든, 현실의 공간이 디지털 세계의 무대의 연장선이 된 것이다. 온·오프라인의 경계가 무너지고 있고, 사람들은 디지털 콘텐트를 오프라인에서 ‘경험’하고 싶어한다. 이 흐름은 단지 일시적인 트렌드가 아니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디지털 혁명은 음악 산업의 패러다임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과거의 음악 산업은 음반 판매를 중심으로 성장했다. 음반 판매가 가장 큰 수입원이었고, 음반을 알리기 위한 수단으로 공연이 중요했다. 그래서 공연에서 올리는 수입은 크게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그저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터넷 혁명은 음악 산업의 구조를 송두리째 변화시켰다. 음반 판매에서 스트리밍 서비스로 중심이 이동한 것이다. 앨런 크루거 전 프린스턴대 교수는 『로코노믹스(Rockonomics)』에서 데이비드 보위의 말을 인용하며 ‘디지털 시대의 음악은 전기나 수돗물처럼 쉽게 접할 수 있는 공공재가 됐으며, 그로 인해 희소성이 사라졌다’고 지적했다. 디지털 음원이 공공재적 성격이 되면서 대부분의 뮤지션에게 음원 수입이 실질적 수익으로 연결되지 못한 것이다. 그렇기에 ‘공연만이 수익의 마지막 기회가 될 것’이라던 경고는 현실화했다.

실제로 북미 뮤지션 수입 상위 1%가 전체 수익의 60%를 가져가는 불균형한 구조 속에서, 나머지 99%는 공연 무대가 아니면 수익을 기대할 수 없는 현실에 놓여 있다. 공연이 단순한 부가 수단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핵심 수단이 된 것이다. 공연은 단순히 뮤지션의 음악을 특정 장소에서 직접 관객에게 전달하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공연산업으로 성장 및 성숙화하고 있으며, 이는 당연히 도시 경제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산업으로 성장·성숙해가는 공연
옥스퍼드 이코노믹스(Oxford Economics) 보고서에 따르면, 2019년 기준 미국 공연 산업의 총 경제 효과는 약 1326억 달러에 달했다. 이 중 직접적인 산업 효과만 552억 달러였고, 간접·유발 효과까지 포함하면 약 91만 개의 일자리를 창출했다. 공연 티켓 100달러가 도시 경제에 미치는 파급효과는 평균 434.92달러로 숙박과 교통, 식음료·쇼핑·레저 등 공연을 중심으로 다양한 산업이 얽혀 있다.
공연은 단지 음악을 듣는 자리가 아니다. 도시가 움직이고, 산업이 연결되며, 사람들이 시간을 쓰는 고밀도의 경제적 사건이다. 공연 산업은 더는 문화 콘텐트 산업의 부속물이 아니다. 그것 자체가 산업이고, 도시 전략의 핵심이 됐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전환의 시대에 준비가 돼 있는가. 이 질문에 답하려면 먼저 K팝 아티스트가 실제로 어디에서 공연하는지를 살펴봐야 한다. 놀랍게도 이들은 서울보다 해외에서 더 자주, 더 큰 규모의 무대에 오르고 있다.
방탄소년단(BTS)은 미국 LA의 소파이 스타디움에서 4회 공연으로 약 21만 명의 관객을 동원해 북미 공연 역사상 두 번째로 높은 수익을 기록했다. 트와이스는 해외 여성 아티스트 최초로 일본 도쿄돔에서 3일 연속 매진을 달성했다. 블랙핑크가 2022년 시작한 월드투어는 총 180만명의 관객을 동원해 아시아 아티스트 중 역대 최고 수익을 냈다. 세븐틴은 올해 초 싱가포르 내셔널 스타디움에서만 약 800만 달러 이상의 매출을 기록했다.
이들 다수가 서울보다 해외 무대에서 더 활발히 공연 활동을 하는 셈이다. 왜 서울이 아니라 해외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무대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무대를 다른 도시들은 치밀하게 준비해왔다.
세계 주요 도시, 공연 생태계 구축
도쿄 수도권에는 ‘도쿄돔 시티’를 중심으로, 대형 스타디움인 도쿄돔(약 5만5000석)과 닛산 스타디움(약 7만2000석), 중형 아레나인 요코하마 아레나(약 1만7000석)와 2023년 개장한 음악 전용 대형 아레나인 K-아레나 요코하마(약 2만석), 소규모 공연장인 도쿄 가든 시어터(약 8000석) 등 다양한 규모의 공연장이 다층적으로 구성돼 있다. 음악과 문화·관광·쇼핑·숙박을 결합해 팬들이 오랜 시간 머무르며 즐길 수 있는 거대한 공연 및 엔터테인먼트 생태계를 이뤘다.
싱가포르는 공연을 도시 마케팅의 도구로 삼는다. 최첨단 공연장과 숙박·쇼핑몰을 결합한 마리나베이샌즈, 약 5만5000석의 최상급 시설을 갖춰 콜드플레이와 BTS 등 글로벌 아티스트의 콘서트가 열린 내셔널 스타디움, 약 1만2000석 규모의 우수한 음향 및 대중교통 접근성을 갖춘 싱가포르 인도어 스타디움 등이 밀집돼 있고, 국가가 직접 공연 유치를 추진한다. 테일러 스위프트가 아세안 지역 중 유일하게 싱가포르에서만 6회 공연을 연 것도,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과 선제적 유치 전략이 뒷받침된 덕분이다.

미국 LA는 공연장을 도시 재생의 앵커로 삼았다. LA시와 AEG사는 낙후한 다운타운 지역을 활기찬 문화 관광 거점으로 탈바꿈하고자 크립토닷컴 아레나(구 스테이플스 센터)를 중심으로 ‘LA 라이브’라는 복합문화지구를 조성했다. 콘서트와 스포츠, 쇼핑·레스토랑, 호텔과 전시 등이 결합한 대규모 엔터테인먼트 단지를 구축해 지속 가능한 도시경제 모델을 구축했다.
영국 맨체스터는 유럽에서 새롭게 부상하는 공연 허브다. 2024년 개장한 ‘Co-op Live’는 영국 최대 음악 전용 아레나로, 첨단 음향 시스템과 공연 최적화 무대 설계 등 월드클래스 시설을 갖췄다. 개장 직후부터 폴 매카트니 등 세계적 아티스트의 투어가 잇따라 열렸으며, K팝을 포함한 글로벌 아티스트의 투어 거점으로 주목받고 있다. 실제로 주요 K팝 그룹의 단독 공연 유치가 활발히 추진되고 있다.
콘텐트 있지만, 올릴 무대 없는 서울
작은 클럽 공연장과 중형 아레나, 대형 스타디움까지 아우르는 공연 인프라는 신인 음악인의 진출 경로가 되고, 그들의 실험과 성장을 가능케 한다. 공연장은 단지 유명 아티스트의 무대가 아니라, 새로운 음악이 자라고 대중과 만나는 살아 있는 플랫폼이다.
하지만 서울의 현실은 척박하다. K팝 공연의 상징처럼 여겨졌던 서울 방이동 KSPO 돔(구 올림픽 체조경기장)은 리모델링을 거쳤지만, 구조적으로 여전히 공연에 최적화된 공간은 아니다. 좌석의 시야 확보에 한계가 있고, 음향 역시 아레나 전용 설계와는 거리가 있다. 고척 스카이돔도 마찬가지다. 야구장을 공연장으로 활용하다 보니, 잔향과 울림 문제로 인해 아티스트와 팬 모두 불만이 많다.
흥미로운 건, 인천 영종도에 위치한 인스파이어 아레나다. 미국 자본으로 건립된 민간 투자 공연장으로 시설 면에서는 세계적 수준에 근접해 있다. 교통이 불편하고 접근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에도 이곳에서 열리는 공연은 매번 매진을 기록한다. 이동의 어려움에도 팬들이 좋은 음향과 구조를 갖춘 공연장에서 ‘제대로 된 공연’을 보고 싶어한다는 증거다.
결국 시설 부족이 문제가 아니라 기획과 투자, 전략의 부재가 본질적인 문제다. 서울은 세계 K팝의 심장이라고 자부하지만, 정작 그 심장을 울릴 ‘무대’는 갖추지 못했다.
차별적 오프라인 경험 제공할 공간 필요
우리는 지금 패러다임 전환의 중심에 서 있다. 첫째, 디지털 시대임에도 MZ세대는 오프라인에서의 차별적 경험을 원한다. 콘텐트를 ‘보는 것’이 아니라, ‘직접 느끼고 체험하는 것’이 중요해진 시대다. ‘케데헌’이 보여준 것처럼 가상의 아이돌이 만들어낸 세계관은 현실의 박물관을 가득 채우며 실체화한다. 디지털 콘텐트의 궁극적 완성은 오프라인 공간에서의 몰입이다.
둘째, 음악 산업의 패러다임 변화로 인해 아티스트는 음원 산업만으로는 생존할 수 없으며, 공연 산업을 핵심 기반으로 삼을 수밖에 없다. 팬과의 실시간 교감, 수익 다변화, 브랜드 강화는 라이브 무대를 중심으로 이뤄진다. 공연은 음악 산업의 미래다.
셋째, 한국은 아시아 변방에서 글로벌을 지배하는 문화 상품을 만들어냈다. BTS와 블랙핑크, 스트레이 키즈와 같은 브랜드는 전 세계의 디지털 플랫폼을 장악했다. 그리고 이제 세계의 팬들은 그 문화를 ‘케데헌’의 무대 서울에서, 서울의 공연장에서, 그것도 제대로 된 몰입 경험을 할 수 있는 공간에서 느끼고 싶어한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준비되지 않았다. 서울은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콘텐트를 만들면서도, 그 콘텐트를 담을 공간과 시스템을 갖추지 못했다.
우리는 과연, 글로벌 K팝 수도의 중심인 서울에서 공연으로 들썩거렸던 기억이 있는가. 단지 스크린과 플랫폼 속의 성공이 아니라 실제 공간을 진동시키고 도시를 움직였던 그 진짜 물리적 열기를 말이다. 이제는 진지하게 답해야 한다. 우리는, 정말 준비돼 있는가.
김경민 서울대 도시계획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