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이민정책 설계자 스티븐 밀러

지난 5월 21일 미국 워싱턴에 있는 이민세관단속국(ICE) 본부. 스티븐 밀러(40) 백악관 부비서실장과 크리스티 노엄(53) 국토안보장관이 참석한 회의가 열렸다. 밀러 부비서실장은 몹시 화가 나 있었다. 불법체류자 체포 건수가 저조하다고 관료들을 질책했다.
밀러는 “하루 3000명 체포하라”고 지침을 줬다. 체포 인원을 기존 1000명에서 3배로 늘리라고 지시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선거 공약인 “연간 수백만 명 체포”를 맞추려고 이렇게 했다. 미국 매체 악시오스가 회의 참석자를 인용해 특종 보도한 내용이다.
이런 지침의 배경은 두 가지다. 국경 단속을 강화하면서 체포 실적이 확 떨어졌다. 예산 부족으로 단속 인원과 시설 등이 턱없이 부족했다. 그래서 밀러는 국경 지역 대신 도시로 가고, 혐의자 명단을 갖고 출동할 생각 말고 일용직 노동자가 모이는 홈디포(건자재 판매점)나 편의점, 공장 같은 일터를 급습해 일망타진하라고 구체적인 명령을 내렸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의 후속 보도 내용이다.
올해 40세, 학창시절 때부터 반이민 성향

지난 6월 초 ICE는 로스앤젤레스(LA) 홈디포 주차장을 급습해 무차별적으로 불법체류 의심자들을 체포했다. 7월에는 캘리포니아주 마리화나 농장에서 불법체류 외국인 361명을 체포했다. 조지아주의 현대차-LG엔솔 합작 배터리 공장 단속도 ‘공장과 같은 일터로 가라’는 밀러의 지시와 일치한다.
밀러는 트럼프 대통령의 이민정책 설계자로 불린다. 반(反)이민정책의 이론적 토대를 쌓고 다양한 방법론을 제시하며 정책을 이끌고 있다. 노엄 국토안보장관과 톰 호먼(63) 백악관 국경 차르가 손발이라면, 밀러는 두뇌다.
반이민정책은 트럼프 국정 운영 기조인 ‘미국 우선주의’와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GA)’를 떠받치는 근간이다. 밀러는 트럼프 1기 백악관에서 ‘선임 정책 고문’을 맡아 이민정책을 총괄했고, 더욱 강력한 권한을 갖고 2기 백악관에 입성했다. 정책 담당 부비서실장 겸 국토안보 고문으로, 이번에는 이민정책뿐 아니라 모든 정책을 총괄하는 사령탑이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밀러를 ‘이민 반대 광신도’라고 표현했다.
밀러는 캘리포니아주 샌타모니카의 부유한 유대인 집안 출신이다. 가족은 민주당 지지자인데, 그는 일찍이 보수 사상에 심취했다. 학교에서 영어를 쓰지 않는 히스패닉 학생들을 조롱하고 학습 능력을 비하하고, 국기에 대한 맹세를 폐지한 교육 행정을 비판했다. 백인 민족주의, 인종주의, 외국인 혐오 성향이라는 비판이 나왔지만, 밀러는 부인했다. 작가 제이슨 젱글러는 뉴욕타임스(NYT) 칼럼에서 “밀러는 좌파가 캘리포니아를 점령해 엉망이 됐고 그 직접적 원인은 이민 문제라고 생각한다”고 주장했다.
밀러는 듀크대 정치학과를 졸업한 뒤 연방 하원의원의 언론 담당으로 워싱턴에 입성했다. 강경 우파 성향의 제프 세션스 상원의원(트럼프 1기 초대 법무장관)실을 거쳐 2015년 트럼프 대선캠프에 연설문 작성자로 합류했다. 트럼프의 본능적인 MAGA 아이디어들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글로 옮기고 정책화했다.
미국-멕시코 국경 장벽 건설, 무슬림 입국 금지, 불법체류 부모와 자녀를 떼어 놓는 ‘무관용’ 정책 등이 밀러에게 나왔다. 감염병 예방을 위한 입국 금지 행정명령 ‘타이틀 42’는 보건 규제를 이민정책에 차용한 기발한 아이디어였다.
트럼프 2기 들어 트럼프와 밀러의 행동은 거침없다. 시민 반발을 누르기 위한 주방위군 투입, 불법체류자의 미국 출생 자녀 시민권 박탈 등 논쟁적인 정책을 쏟아냈다.
밀러는 합법 이민도 제한해야 한다고 믿는 ‘급진적 이민 제한론자’다. 지난해 대선 찬조연설에서 “미국은 미국인을 위한, 미국인만의 것”이라고 말했다. 트럼프가 자신보다 밀러가 심하다고 농담할 정도다. 지난해 회의에서 “밀러가 말하는 대로 이민정책을 펴면 인구가 1억 명밖에 남지 않을 것이며, 전부 밀러처럼 생겼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런 언론 보도 내용을 백악관은 부인했다.
트럼프 낙선 때 800억 모아 ‘마가’ 홍보
밀러는 2020년 대선에서 낙선한 트럼프를 떠나지 않았다. 트럼프를 ‘팔아’ 돈을 벌 기회도 마다했다. 대신 2021년 비영리 싱크탱크 아메리카 퍼스트 리걸(AFL)을 세웠다. 3년간 기부금 6044만 달러(약 838억원)를 모아 2기 트럼프 정부의 정책을 연구하고 MAGA를 홍보했다. 트럼프 취임 초기에 발표한 수백 개의 행정명령은 밀러의 4년 준비의 결실이다. 급진적인 정책을 발표할 때는 한꺼번에 압도할 정도로 쏟아내 언론·법원이 검증할 엄두를 못 내게 하는 ‘홍수 범람’ 전략도 그의 아이디어였다.
밀러는 트럼프에게 맞서지 않는다. 모든 이민을 줄여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예외를 둘 수 있다는 트럼프를 따른다. 트럼프가 외국인 숙련 근로자를 위한 H-1B 비자 지지 의견을 밝힌 것에도 마찬가지다. 밀러의 장수 비결이다.
지금, 트럼프 2.0시대에 워싱턴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은 누구일까요. 1만 3000명 중 47인을 추렸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