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블랙도 시원할 수 있다, 소재만 잘 고르면…
박민지 패션 디자이너

며칠 전 패션 디자이너들의 모임이 있었다. 마치 모두가 약속이나 한 듯 절반 이상은 블랙, 나머지는 화이트를 입고 왔다. 한여름 더위에도 누군가는 블랙 셔츠에 쇼트팬츠를, 또 누군가는 블랙 티셔츠에 롱스커트를 입었다. 최소 20년 이상 업계에 몸담아온 이들이라 그런지 과하게 멋을 부리지 않아도 무심한 듯 한 끗 차이로 자신을 표현하는 것 같다.
여름은 밝고 가벼운 색의 계절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어떤 이들은 여름에도 블랙을 입는다. 도심을 걷다 보면 뜨거운 햇볕 아래에서도 검정 옷을 입은 사람에게 눈길이 간다. 블랙을 입는다는 것은 결국 스타일링에 대한 철학의 문제인 것 같다. 그래서일까. 조용히 자신을 드러내는 이들이 선택하는 컬러는 단연 블랙이다. 블랙은 더운 계절이라고 해서 무조건 피해야 할 색이 아니라 나만의 감각을 섬세하게 표현해주는 색이다.
땀을 걱정하기보다 실루엣을 생각하는 사람, 덥다는 말보다는 멋을 말하는 사람. 여름에도 블랙을 입는 사람은 계절보다 자신의 스타일에 더 집중하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블랙이 ‘시크하다’는 건 누구나 안다. 하지만 블랙이 가볍고 시원할 수도 있다는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정답은 ‘소재’에 있다.
리넨(마직물)은 피부에 달라붙지 않아 바람이 통하는 듯한 시원함이 있다. 구겨져도 그 주름이 자연스럽고, 여유로운 블랙의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셔츠, 드레스, 팬츠, 스커트 등 여름철 모든 아이템에 두루 활용할 수 있다.
보일(얇은 거즈직물)은 가볍고 부드러우며 은근한 비침이 있다. 한 겹만 입어도 시원하고, 블랙에 산뜻함을 더해줄 수 있다. 셔츠나 블라우스, 볼륨감 있는 스커트에 특히 잘 어울린다.
크레이프(주름직물)는 표면의 미세한 요철로 깊이감과 적절한 무게감을 지닌다. 구김이 적고, 움직임에 따라 부드럽게 흐른다. 톱이나 블라우스, 원피스처럼 드레이프(자연스럽게 늘어지는 주름과 곡선)가 중요한 아이템에 적합하다.
저지(면으로 만든 운동복 소재)는 신축성이 좋아 활동하기에 편하다. 얇게 짜인 여름용은 가볍고 시원하며, 티셔츠와 드레스 모두에 잘 어울린다. 볼륨이 넓은 드레스나 간결한 일자형 드레스도 멋스럽게 연출할 수 있다.
비스코스(인견)는 매끄럽고 차가운 촉감이 특징이다. 늘어뜨렸을 때 자연스러운 주름이 잡히는 드레이프성이 뛰어나 블랙 컬러의 실루엣이 유려하게 떨어진다. 톱, 팬츠, 원피스 등 다양한 실루엣을 소화할 수 있는 여름철 전천후 소재다.
코튼 포플린(평직 면직물)은 빽빽한 평직으로 짜여 표면이 매끄럽다. 청량한 촉감과 단정한 형태감을 유지하며, 셔츠, 원피스, 팬츠, 아우터까지 사실상 모든 아이템 제작에 활용 가능한 범용성 높은 소재다.
여름철 블랙 소재는 하이엔드 패션 브랜드와 데일리 브랜드의 사례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브랜드 ‘더 로우’는 블랙 실크 크레이프 소재로 절제된 롱드레스를 선보인다. 크레이프는 깊이감을 더하고, 드레이프성이 뛰어나 움직임에 따라 유연하게 흐른다. 덕분에 롱드레스의 실루엣이 단정하면서도 고급스럽게 떨어진다.
‘토템’은 민소매 비스코스 니트 상의에 얇게 비치는 보일 스커트를 매치해 우아하면서도 지루하지 않은 스타일을 제시한다. 비스코스는 매끄럽고 시원한 촉감으로 블랙의 선명함을 살리고, 니트에도 부드러운 흐름을 더한다. 보일 소재 스커트는 가벼운 비침과 공기감으로 산뜻한 볼륨을 연출한다.
‘로에베’는 고급스러운 실크 골지 니트와 코튼 배럴 레그 팬츠로 여유로운 캐주얼룩을 완성한다. 실크 니트는 부드러운 광택과 매끄러운 촉감으로 상체 라인을 정제되게 감싸고, 코튼 배럴 레그 팬츠 특유의 허벅지 볼륨과 발목 쪽으로 좁아지는 곡선 덕분에, 캐주얼하면서도 세련된 블랙 팬츠 스타일이 갖춰진다.
‘자라’는 리넨, 보일, 크레이프, 코튼 포플린 등 여름 블랙에 어울리는 소재를 거의 모두 갖추고 있다. 셔츠, 드레스, 팬츠, 스커트까지 실루엣의 폭도 넓어, 한 시즌 안에서도 다양한 결의 블랙 룩을 경험할 수 있다.
‘유니클로’는 최근 코튼 배럴 팬츠로 공전의 ‘히트 아이템’을 만들어냈다. 허벅지에 볼륨을 주고 발목으로 좁아지는 곡선형 실루엣 덕분에, 블랙 팬츠임에도 답답하지 않고 경쾌하다. 여기에 저지 티셔츠, 리넨 셔츠 같은 여름 블랙의 기본 아이템을 더하면 유행과 실용성을 모두 잡을 수 있다.
‘무신사’는 스트리트 감각이 가미된 여름 블랙 아이템이 강점이다. 보일 소재 스커트나 크레이프 원피스처럼, 소재 특유의 질감을 트렌디한 실루엣에 입혀 새로운 여름 블랙을 제안한다.
블랙을 잘 입는 방법은 상·하의 소재를 다르게 매치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답답해 보이지 않고, 같은 블랙 컬러라도 두께감의 차이로 한층 가벼운 인상을 줄 수 있다. 상의가 민소매라면 하의는 길게, 상의가 긴소매라면 하의는 짧게 입는 것만으로도 경쾌해 보인다. 이 공식은 도심에서만 통하는 것이 아니다. 리조트에서도 풍성한 블랙 드레스를, 혹은 짧은 팬츠에 블랙 리넨 셔츠를 입어보자. 누구보다 스타일리시하면서도 편안해 보일 것이다.
여름의 끝에서, 올 블랙이야말로 시크함을 가장 손쉽고 감각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선택이 되어줄 것이다.

박민지 디자이너
패션 디자이너. 파리에서 공부하고 대기업 패션 브랜드에서 패션 디자이너로 20여년간 일했다. 패션 작가와 유튜버 ‘르쁠라’로 활동 중이다. 최근 세 번째 저서 <세계 유명 패션 디자이너 50인>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