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민씨, 노조 사무실로 잠깐 와주실 수 있나요?”라는 연락을 받았을 때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혹시 직장 내 괴롭힘으로 신고당했나, 하고. 다행히 다른 일이었지만 그때 새삼 생각했다. 내가 누군가를 괴롭힌 적이 없다고 확신하기 어렵다.
오래된 공포가 있다. 네이트판이나 트위터 같은 SNS에서 고발 대상이 되는 것이다. 알지도 못한 사이 누군가를 괴롭게 만들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전에 만난 애인들, 얼굴도 흐릿한 동창, 함께 일했던 사람, 취재원이 언제든 내 잘못을 들춰도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나를 괴롭힌 사람들도 내가 괴로운 줄 모르고 그렇게 행동한 경우가 많았을 거라고 짐작하기 때문이다.
뉴스에는 주변인을 아주 적극적으로, 지속해서, 악의를 가지고 괴롭힌 이들이 등장한다. 누군가를 고통스럽게 하려고 괴롭힌 사람들. 누군가 힘들 걸 알면서도 자기 욕심을 앞세운 사람들. 그러다 유명해져서, 혹은 더 높은 자리에 가려다 끝끝내 폭로를 당한 사람들.
그러나 더 많은 사람이 ‘잘 모르고’ 괴롭힌다. 자신의 행동이 가해가 될 줄 모른다. 무심코 던진 말, 편의를 위한 결정, 조직 속 관행이 누군가에겐 상처라는 걸 끝끝내 모른다. 그래서 제대로 된 사과와 용서 없이 시간이 지나가기도 한다.
나도 누군가에게는 피해자지만, 누군가에겐 가해자다. 그리고 누군가에게는 피해자면서 동시에 가해자다. 부모와의 관계만 생각해도 분명한 사실이다.
뉴스에서 사건·사고를 접할 때 우리는 으레 가해자는 가해자답기를, 피해자는 피해자답기를 기대한다. 가해자는 우리와 다른 얼굴을 한 파렴치한일 것이라고, 피해자는 크나큰 상처를 입어서 나와 같은 일상을 영위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납작하게 상상하기 쉽다.
통념에 어긋나면 사실관계조차 의심당한다. 나에게는 다정했던 그 사람이 가해자라니 그럴 리 없다고 여기거나, 피해자가 저렇게 당당하거나 야무질 리 없다고 쉬이 판단하기도 한다.
책 <시장으로 간 성폭력>은 성폭력 피해자들은 엄청난 정신적 충격으로 언제나 우울하고 고통 속에 빠져 있을 것이라는 이미지가 존재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피해자는 힘들고 슬프기도 하지만, 우울한 감정에서 벗어나기 위해 맛집을 찾아가거나 여행을 떠나기도 하고 우울한 기색을 보이고 싶지 않아 밝은 모습을 SNS에 올리기도 한다.” 문득 고통이 찾아와도 일상을 이어간다.
가해자 역시 대부분 평범한 사람이다. 가해자 책임을 덜어주려는 건 아니다. 경계하지 않으면 누구나 그 자리에 설 수 있다고, 폭력이 반복되지 않으려면 개인뿐 아니라 사회도 성찰해야 할 때가 있다고 말하고 싶다. 성폭력, 학교폭력, 아동학대, 직장 내 괴롭힘 등 온갖 지탄을 받는 일들을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이 저지른다. 나와 다른 사이코패스나 악마 같은 인간들만 ‘가해’를 한다고 여기면, 사건 이후에도 사회나 조직의 문제를 개선하는 데 실패할 수밖에 없다. “유일한 예방은 가해자가 가해를 하지 않는 것뿐”(<시장으로 간 성폭력>)인데도 말이다.
남에게 한 톨의 피해도 입히지 않고 살 수는 없다. 가해자가 되지 않는 방법은 ‘나는 그런 사람과 다르다’고 부인하는 데 있지 않고, 내가 휘두를 수 있는 권력을 인지하고 세심히 다루는 데서 찾을 수 있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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