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세이(長生) 탄광은 일본 야마구치현 우베시 도코나미 해안에 있던 중소 규모의 탄광이다. 군국주의 일본은 1941년 태평양전쟁으로 더 많은 지하자원이 필요해지자 석유를 대신할 자원인 석탄 채굴에 몰두했다. 조세이 탄광은 해저갱도의 위험성이 높고 노동환경이 열악해 일본인들이 기피하는 곳이었고, 이를 메우기 위해 조선인들을 강제동원했다.
1942년 2월3일 새벽 갱도 천장이 무너져 내리며 바닷물이 흘러들어 183명의 광부가 수몰됐다. 희생자 중 136명이 조선인이었다. 사고 다음날 간단히 보도된 이후 진상은 묻혀 있었다. 탄광을 운영하던 회사는 시신 수습이나 보상은커녕 사고를 은폐하기 급급해 소나무로 갱도를 막은 뒤 콘크리트를 부어 덮어버렸다.
이 사고는 역사 교사였던 야마구치 다케노부(2015년 사망)가 1976년 지역 학술지에 ‘조세이 광산 재해에 관한 노트’라는 글을 발표하며 재조명됐다. 뜻있는 지역 시민들이 1991년 ‘혹시나’ 하고 수몰자 명부에 적힌 주소로 국제우편을 보냈다가 한국 유족들과 연락이 닿았다. 시민들은 ‘조세이 탄광 수몰사고를 역사에 새기는 모임’(대표 이노우에 요코)을 만들어 추모사업을 벌였다. 2014년부터는 아예 유골을 수습해 유족들에게 돌려주는 것으로 사업을 전환했다. 일본 정부가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자 시민들이 모금을 통해 유골 발굴에 나섰다. 지난해 9월 82년 만에 갱도 입구를 찾아냈고, 한·일 양국 잠수사가 투입돼 수중 수색작업을 벌여왔다. 수중작업 시작 10개월 만인 지난 25일 사람의 대퇴부 뼈로 보이는 물체 등 3점을 수습한 데 이어 26일 마침내 희생자의 것으로 추정되는 두개골을 발견했다.
한국과 일본은 2004년 정상회담에서 강제동원 조선인 유골 반환에 합의한 바 있다. 하지만 조세이 탄광에 대해 일본 정부는 유골이 실재하는지 알 수 없고, 조사 작업의 안전성을 이유로 들며 회피해 왔다. 이번에 유골이 확인된 만큼 일본 정부도 회피할 명분이 사라졌다.
지난해 한국을 방문한 이노우에 대표는 “양국 정부가 미래지향을 말하지만 이렇게 유골을 방치하고 어떤 미래지향이 있을 수 있나요”라고 물었다. 과거를 건너뛰고 미래로 갈 수는 없다. 한·일 양국이 함께 힘을 모을 차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