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사람의 특별한 이야기’ 그려온 김준범 <기계전사109> 복간···‘광주항쟁’ 등 담은 한국SF 대표작

2025-06-08

김준범 작가는 유명 미대를 들어가려다 학력고사 수학을 최소한 반은 맞춰야 한다는 소리를 듣고 고민했다. 그즈음 평소엔 잘 가지 않던 만화방에 갔다가 빠져들며 읽은 게 이현세 화백의 <공포의 외인구단>이다. “서양화 대신 만화를 그려도 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죠. 가장 좋아하던 만화가인 허영만 선생님 화실로 무작정 찾아갔죠.”

1985년 일이다. 허 화백 문하생 5년째이던 1989년 12월 지금도 회자하는 작품 1회 원고를 출고한다. 만화잡지 ‘아이큐 점프’ 1990년 1월호에 실린 <기계전사109>다. 김 작가는 “허영만, 이현세라는 사자, 호랑이 밑에서 다들 기를 못 폈죠. 마흔이 넘어도 데뷔를 못하기도 했어요. 언제 내게 기회가 올지 몰라 (제안을 받고는) 그냥 해야겠다고 해서 20대 초에 데뷔한 거죠.”

당대 인기작이자 후대의 연구 대상 — <기계전사109>는 한국 SF 만화 대표작이다. 당대 인기작이자 후대 연구 대상이다. ‘사회의식’을 반영한 작품이란 게 후대 큰 평가를 받는다. 박선영 미국 서던캘리포니아대학교 동아시아학과 젠더학 부교수는 “할리우드의 환상적 표현 양식을 사용해서 민주화를 위한 당대의 투쟁을 상징적으로 재현했다”고 평가한다. ‘광주 항쟁’ ‘삼청교육대 폭력’ 등을 떠올리는 장면을 두고 내린 평가다. 인간 대 사이보그의 대립 묘사에 계급 간 지배와 피지배 문제를 녹였다. 사람들은 인간 주인은 군사정권, 사이보그 해방전선은 민중에 대입해 읽었다.

‘아이큐 점프’ 연재가 끝나고 나온 4권짜리 단행본은 구하기 힘들었다. 중고책 가격은 49만9000원까지 올랐다. <기계전사109>에 관한 논문을 쓰려 책을 구하다가 어려움을 겪은 장성진 중앙대 영문학과 교수가 바다출판사에 복간을 제안했다. 최근 복간판이 인터퀄 <인조반려인간>과 함께 나왔다.

<기계전사109> 스토리는 고 노진수 작가가 맡았다. “진수 형이 민주화 열망이 컸다. 작품으로 비판도 하고 싶어했다”고 했다. “저는 민주화니 뭐니 잘 모르고 살았어요. 1987년 대선 때 군 훈련소에 있었는데, (간부들이) 1번(노태우 당시 민정당 후보) 찍으라고 강요하는 걸 봤죠. 운동권 학생이 간부들한테 맞는 것도 목격하고요. 이 세상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그 뒤로 5·18항쟁 사진집도 봤죠. 이런 경험을 해 진수 형이 하는 말을 조금 알아들었죠.”

김 작가는 작화 당시 SF 팬이었다. “당시 작가들이 웬만하면 SF 장르에 관심을 뒀다. 그냥 작품으로, 실행에 옮긴 사람이 저일 뿐”이라고 했다.

<아키라>의 오토모 가쓰히로, <공각 기동대> 작가 시로 마사무네와 극장판 애니메이션 감독 이소이 마모루를 작품에 영향을 준 작가라고 했다. “<공각 기동대>는 물질과 비물질, 육체와 정신 문제를 다루죠. 일본 애니메이션은 철학 얘기를 일찌감치 했고요. 미국 마블은 1970년대부터 양자역학 같은 이야기를 넣었어요.” 김 작가는 “그때 한국 SF 세계관이 미국이나 일본에 뒤처진 듯해 자존심이 상했다”고 한다.

김 작가는 자신을 인조인간으로 여기는 인간과 인간보다 인간적인 인조인간 이야기를 다룬 <인조반려인간>에 철학 문제를 더 녹였다. 출간 예정인 프리퀄 <프로토109>엔 AI와 영혼, 인간과의 관계 설정 문제를 다루며 ‘기계전사109 세계관’을 심화하려 한다.

복간과 연작 재개 소회를 두고는 이렇게 답했다. “산소 호흡기를 단 것 같아요. 작품 활동을 이어가는 게 가능할지 생각을 많이 하던 때 복간됐어요.” 만화가 ‘산업’ ‘콘텐츠’가 되면서 작가주의 작가 설 자리는 좁아진다고도 했다.

<인조반려인간>은 ‘2024 다양성 만화 제작 지원’ 선정작이다. “다양성이라는 거는 주류가 아니라는 말이죠.” 그는 “한국만화영상진흥원에서 진행하던 이 사업이 올해부터 한국콘텐츠진흥원으로 갔다. 지난 4월 말 올해 선정 결과가 나왔는데, 소속사 없이 활동하는 작가주의 작가들이 다 탈락했다”고 전했다.

웹툰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거의 모든 작가가 겪는 문제다. “작가는 소모품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죠. 젊고, 원고료 싸고, 말 잘 듣는 작가들이 웹툰을 하는데, 이들도 2~3년 안에 도태되는 구조예요. 아이돌 시장처럼 돼버렸어요.” 노동 강도도 세어졌다고 한다. “컬러링 뒤 먹물이 마를 때까지 기다릴 필요 없다는 거 빼고는 다 나빠졌어요. 흑백만화 시절보단 노동력이 4배 정도 들어요.” 그는 “나이가 어린데, 갑자기 병으로 죽는 작가, 자살하는 작가, 유산하는 작가가 계속 나온다”고 했다.

예전이 마냥 좋았던 건 아니다. <기계전사109>로는 돈을 못 벌었다고 한다. “만화계 선후배들이 제가 한 10억원쯤 번 줄 알아요. 원고료 말고는 10원도 못 벌었어요. 연재 중에 단행본으로 바로 나와야 했는데, 전국 모든 인쇄소가 <드래곤볼>만 찍었어요. 일본 만화를 출판하려고 창간한 만화 잡지니, 한국 작가에 대한 애정 같은 게 거의 없었어요.”

<기계전사109>는 명예를 안겨줬지만, 족쇄로도 작용하는 듯했다. 김 작가는 35년간 순정만화부터 시사만화까지 여러 장르를 시도했는데, 지금도 SF 작가로만 불리는 게 부담이라고 했다. “<드래곤볼>과도 경쟁하던 작품들도 냈는데, 그런 작품들은 잊혀 간다”고 했다.

김 작가가 천착하는 건 사람이다. 보통 사람들의 특별한 이야기다. 웹툰 <저 하늘을 보면>은 UFO를 목격했기 때문에 사회로부터 소외당하는 사람들 이야기다. “작품을 직접 본 사람들 댓글 보면 반응은 폭발적이었어요. 선배님들이 ‘영화로 만들면 좋겠다’는 격려 전화도 많이 했고요.”

인간과 철학에 관한 고민은 마음공부, 별자리 공부와도 이어진다. 김 작가는 ‘별자리 심리학자’로도 일한다. 별자리 TV(youtube.com/@purgontv)를 운영한다. 하루선방(postype.com/@haruzen)에 종종 명상만화도 올린다. “2000년 이후 폐병에 걸렸고, 우울증도 앓았어요. 2002년 월드컵 때 별자리와 마음공부를 시작했어요. 자아 성찰에 도움을 많이 받았죠.” 2009년 에세이 <별이 전하는 말>도 출간했다. 지금 개인 상담과 별자리 강의를 하며 산다.

만화는? “만화계 안팎의 상황을 보면, ‘영영, 못하겠네’ 싶기도 해요. 올 초 기회를 갈구하지 않는 삶을 살겠다고 다짐했어요. 지금은 마음공부 하면서 간간이 그림 그리는 삶을 좇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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