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권이 들어서면 먼저 하는 일은 화려한 개혁안을 제시해 흐트러진 민심을 추스르는 것이다. 그러자면 할 소리를 못 하고 안 할 소리를 한다. 이루어질 수 없는 허상도 표만 될 수 있으면 내지르듯이 제시한다. 그러나 백성은 그 개혁안에 관심을 기울이지도 않고 시큰둥한 채 남의 얘기 듣는 듯한다. 백성은 권력 앞에 풀처럼 드러눕는다. 배고픔과 세금을 통한 수탈이 이뤄지지 않는 한 백성들이 저항하는 일이란 그리 흔치 않다.
백성들은 이토록 순진한데 왜 개혁은 더디며 삶은 좋아지지 않는가? 그것은 통치자가 관료를 장악하는 데 실패하기 때문이다. 대통령은 관료를 장악할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중국의 정치가 한비자(韓非子·그림)의 말을 빌리면 “영명한 지도자는 관료를 다스리지 백성을 다스리지 않는다(明君治吏不治民).”(『한비자』 ‘외저설(外儲說)’)

그렇다면 한국을 이끌어가는 데는 얼마나 많은 관료가 필요할까? 한국의 경우 차관급 이상만 1200명 정도다. 비(非)정무직을 제외하더라도 적어도 700명의 차관급 관료가 필요하다. 어떤 대통령은 그만한 관료를 갖추지 못한 채 대통령에 취임해 신발장 정리하던 집사에게도 국회의원 공천을 주는 등 마당쇠 정치를 할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그의 재임 중의 공적은 비리로 얼룩졌다.
관료에게는 충성이나 애민 같은 어려운 요구를 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영혼이 없다. 지금 한국 정치에 감동이 없는 것도 관료가 움직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다음 정권의 향배에 온 후각을 집중하고 있다. 누가 장관·기관장으로 올 것인가? 나는 어디로 가게 될까? 그들은 언제든지 집권자를 버릴 만큼 비정하고 비열하다. 이를 깨닫지 못하고, 관료의 장악에 실패한 집권자는 불행하다. 관료에게는 자신의 삶이 충성보다 먼저다. 다음에도 집권할 수 있다는 가능성과 힘을 보이지 않는 한 관료는 따르지 않을 것이다.
신복룡 전 건국대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