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공지능(AI), 디지털, 바이오, 나노 기술이 서로 융합해 전 세계 산업과 사회의 경계를 재편하고 있다. 기존 기술을 단순히 개선하거나 효율화하는 방식으로는 더 이상 경쟁력을 유지하기 어려운 시대다.
대한민국이 다시 한번 도약하려면 창의성과 융합을 중심에 둔 기술혁신 전략이 절실하다. 이제는 주어진 문제를 잘 푸는 것보다, 지금까지 없었던 문제를 발굴해 풀어내는 능력이 중요하다.
우선, 창발적 아이디어가 자연스럽게 솟아날 수 있는 생태계를 조성해야 한다. 이는 연구자, 기업인, 학생이 정답이 없는 난제에 도전할 수 있도록 장려하고, 실패를 경험의 일부로 인정하는 사회적 관용과 정책적 뒷받침이 필수적이다.
다양한 분야 지식과 인사이트가 융합할 수 있도록 대학, 연구소, 민간기업 간의 자유로운 협업 환경을 제도적으로 마련해야 한다. 사회·환경·문화 문제를 기술적 상상력으로 전환할 수 있는 '문제설계형 공모'나 '도전적 난제 해결 프로그램'은 창의성 발현의 기폭제가 될 수 있다. 대구경북과학기술원(DGIST)은 지난해부터 'N-HRHR'이라는 문제발굴형 경진프로그램을 기획·운영하고 있다.
둘째, 창의적 아이디어가 실험되고 구체화 되는 단계, 즉 기초연구와 응용기술의 간극을 메우는 전략적 투자가 필요하다. 새로운 기술은 대개 불확실성이 크고, 경제적 타당성이 명확히 드러나지 않는다.
이 과정에서 정부는 다학제 융합연구를 장기적 관점에서 지원하고, 실험적 시도를 장려하는 방향으로 연구개발 시스템을 재설계해야 한다. 기초와 응용의 이분법이 아닌, 문제 중심의 통합적 접근이 필요한 시점이다.
DGIST는 경북 구미시에 공학전문대학원을 새로이 설치하고 지역 기업 소속 임직원을 첫 신입생으로 받았다. 학생들은 공학전문석사 학위과정 동안 소속 기업의 혁신을 위한 문제를 정의한 후, DGIST의 교원들과 함께 머리를 맞대고 해결책을 찾는다.
셋째, 기술이 실험실을 떠나 실제 시장에 도달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죽음의 계곡'을 건너기 위한 기술 실증·검증 인프라를 강화해야 한다. 이를 위해 지역 기반의 테스트베드, 민관 연계 기술검증 플랫폼, 초기 제품 구매를 통한 수요 견인이 중요하다.
공공부문이 초기 수요자가 되어 중소·창업 기업의 기술을 적극적으로 도입하는 것은 시장 진입의 결정적 디딤돌이 된다. DGIST는 생산기술 확보와 시장 개척을 위한 산학연 프로그램인 'D-PIC(디지털혁신클러스터) 사업'을 시행하고 있다.
넷째, 시장에 진입한 기술이 글로벌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도록 브랜딩과 네트워킹을 지원해야 한다. 단순히 기술이 우수하다고 시장에서 성공하는 것이 아니기에 디자인, 사용자 경험, 유통채널, 글로벌 협업까지 고려한 전주기 전략이 필요하다.
정부와 대기업이 함께 스타트업이나 혁신기업과 파트너십을 맺어 해외진출을 공동기획하고 추진하는 전략이 효과적이다. DGIST는 올해 1월 혁신성장실과 기업혁신성장센터를 신설·운영 중이다.
마지막으로 이 모든 과정을 연결하고 조율할 수 있는 통합형 혁신 지원 시스템이 필요하다. 기술·인재·자본·제도가 단절되지 않고 하나의 목표를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조정·연결하는 역할이 중요하다.
이는 단순한 행정 효율화를 넘어 '혁신을 설계하는 시스템'을 의미한다. DGIST는 올 5월부터 온라인 기업혁신성장플랫폼을 구축해 기업의 혁신 수요에 실시간 대응을 하고 있다. 이 플랫폼의 코디네이터를 자청한 DGIST의 연구자(교원·연구원 등)들이 수요기업의 문제를 재정의함으로써 시행착오를 대폭 줄일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대한민국이 직면한 가장 큰 도전은 기술 그 자체가 아니라, 창의성과 통찰을 바탕으로 기술을 활용하는 방식에 있다. 창발적 사고와 통섭적 협업이 구조화된 국가 시스템 안에서 작동할 때, 우리는 미래산업과 사회를 이끌 선도국가로 나아갈 수 있다.
신경호 대구경북과학기술원(DGIST) 연구부총장 kshin@dgist.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