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일찍 떠서 자기관리 실패…나처럼 되지말라 후배들 가르쳐

팔순 맞은 영원한 ‘아시아의 표범’ 이회택 감독

지난 10월 13일 저녁, 서울 강남구 리버사이드호텔 식당에서 조촐한 파티가 열렸다. ‘아시아의 표범’으로 불렸던 이회택 한국OB축구회 회장의 팔순을 축하하는 모임이었다.

최순호·황선홍·박경훈·고정운·신홍기 등 한국축구 레전드 40여 명이 모였다. 한양대와 포항제철, 대표팀 등에서 이회택 감독과 함께했던 제자들이 자발적으로 자리를 마련했다. 이들은 스승의 젊은 시절 모습이 담긴 사인지에 축하 메시지를 적어 선물과 함께 전달했다.

이 회장은 뿌듯한 표정이었다. “마음만 먹으면 수백 명 초청해 떠들썩하게 잔치 할 수도 있지만 부담 줄까 봐 안 하려고 했어요. 몇몇 제자들이 쑥덕쑥덕 하더니만…. 그 마음이 너무나 고맙고, 그 동안 고생한 아내한테도 면이 서네요”라면서 쑥스럽게 웃었다.

이회택은 1960~70년대 축구 대표팀에서 최전방 공격수로 활약했다. 대한축구협회 공식 기록은 A매치 82경기 출장에 21골이지만 이보다 수십 골은 더 넣은 것으로 그는 기억한다. 은퇴 후 모교인 한양대 감독을 거쳐 프로축구 포항·전남 감독을 역임했다. 1988년 대표팀을 맡아 90년 이탈리아 월드컵 본선행을 이끌었다. 축구협회 부회장과 기술위원장으로 일할 때는 2006 월드컵 본선 진출(독일), 2010 월드컵 원정 첫 16강(남아공)에 기여했다.

팔순잔치가 끝난 다음 주, 효창운동장에 있는 한국OB축구회 사무실에서 이 회장을 만났다. 그는 손수 승용차를 운전할 정도로 건강하고, 에이지슈트(나이보다 적은 타수를 치는 것)를 자주 기록할 정도로 골프도 즐긴다.

최순호·황선홍 등 후배들이 ‘팔순잔치’

팔순을 축하드립니다. 지난 축구 인생을 돌아보시니 어떤가요.

“힘 좋고 빠르기만 했던 김포 촌놈이 선생님 잘 만나 성공했죠. 다만 너무 일찍 스타가 되는 바람에 자기관리에 실패했어요. 더 큰 선수가 될 수 있었는데 아쉽죠. 내가 자서전을 못 써요. 한 짓이 있어서(웃음). 지도자를 하면서는 재능 있는 선수가 나처럼은 안 되길 바라면서 정성껏 가르쳤다고 자부합니다. 내 밑에서 한국축구를 이끈 레전드가 나오고, 그들이 좋은 지도자로 성장하는 걸 보면서 흐뭇합니다.”

고등학교를 네 군데나 다니셨죠.

“동네축구를 하다 중3부터 선수를 했는데 웬만한 고3보다 더 빨랐어요. 김포농고 들어가던 해, 리(里) 대항 축구대회가 열렸는데 선배들이 국가대표급을 서울서 데리고 왔어요. 그 형들이 볼 다루는 게 서커스 같아서 ‘축구를 저렇게 하려면 서울로 가야겠다’ 결심했죠. 한양공고에 테스트 받으러 갔다가 일주일 만에 잘렸고, 영등포공고에서 넉 달간 연습한 뒤에 첫 경기에서 두 골을 넣었어요. 그런데 정식 입학은 하지 않고 축구협회에 등록만 한 ‘부정선수’로 찍혀 경기 출전이 어렵게 됐죠.”

그때 동북고에서 손을 내밀었네요.

“동북고 박병석 감독님이 땅딸한 게 총알처럼 뛰어다니니까 ‘저놈을 대한민국 최고 선수로 만들겠다’고 하셨대요. 8월 말에 동북고로 옮겼는데 부정선수라 다음 해 4월에야 경기에 나갈 수 있었죠. 그 동안 감독님이 야생마 같은 촌놈을 인간개조 시킨 겁니다. 볼 트래핑, 패스, 볼 없을 때 움직임 등 기본기를 철저히 가르치셨죠. 한해 위 김기복이 청소년 대표팀 갔다 와서 태극기와 KOREA를 새긴 유니폼을 입고 다니는데 그렇게 부럽더라고. ‘김기복을 넘어서겠다’는 목표로 감독님이 전수해 주신 기술을 밤늦도록 다지고 다지면서 내 것으로 만들었죠.”

돌멩이 상대로 페인팅 연습도 했다는데.

“나는 박 감독님을 그냥 코치가 아니라 신(神)이라고 생각해서 그분이 시키면 뭐든지 했어요. 하루는 ‘걸어 다니다가 돌멩이가 보이면 그놈이 상대 수비수다 생각하고 페인트 모션으로 제치고 가라’고 하시는 겁니다. 몇 번 해봤는데 도저히 쑥스러워서 안 되겠어요. ‘그럼 마음속으로 동작을 하면서 지나가라’ 하시대요. 요즘 말로 ‘이미지 트레이닝’이죠. 내가 빠르기만 한 게 아니라 골키퍼 제치고 골 넣을 정도로 개인기도 있었던 게 그런 연습 덕이라고 봐요.”

이회택은 동북고 2학년 때 청소년대표에 선발됐고, 3학년이던 1966년 방콕 아시안게임 대표로 뽑혔다. 그리고 1967년 2월, 그의 운명을 바꿔 놓을 양지(陽地)축구단이 창단된다.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에서 북한이 8강에 오르자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이 “북괴를 꺾을 최강 팀을 만들라”고 지시해서 창단된 게 양지축구단이다. 군·실업 에이스들만 모은 사실상의 국가대표팀인데, 서울 이문동 중앙정보부 내 장교숙소에서 숙식을 하고 훈련도 정보부 운동장에서 했다. 국내 최초로 105일간 유럽 전지훈련도 했다. 막상 북한과는 붙어보지도 못하고 1970년 해체됐다.

양지축구단은 어땠나요.

“훈련은 엄청 힘들었지만 대우는 최고로 해 줬지요. 쌀 한 가마니에 4000원 하던 시절에 월급이 2만5000원이었으니까.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중정 소속이니 어딜 가나 최고 대접을 받았죠. 선배들이 막내인 나를 예뻐해서 여기저기 데리고 다니면서 ‘스타는 공만 잘 차선 안 돼. 술·오락·연애 등 못 하는 게 없어야지’ 그랬지요.”

차범근처럼 해외 나갈 생각은 없었나요.

“기량보다는 사생활이 문제였죠. 제대로 축구한 지 4년 만에 67년 메르데카배 우승하면서 아시아 올스타에 뽑혔으니까. 국가대표가 된 이후 한 번도 후보였던 적이 없었어요. 그렇게 진탕 놀고 들어와도 발목 몇 번 돌리고 운동장 나가면 펄펄 날았으니까. 차범근이 독일에서 성공한 가장 큰 요인이 부인(오은미 여사) 잘 만난 거라고 봐요. 축구 외에 아무 것도 못 하게 막아줬잖아요.”

지도자를 하면서는 어떤 철학이 있었나요.

“대학이나 실업팀에 올 나이면 플레이 습관이 몸에 밴 상태입니다. 잘못된 걸 아무리 고쳐주려 해도 힘들어요. 장점을 발휘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심리적 안정과 자신감을 심어주는 게 중요합니다. 내가 포항제철 마지막 해 신예들을 기용하면서 ‘실수해도 90분 동안 안 뺄 테니까 너 하고 싶은 대로 해라. 단 기회는 한 번뿐이다’라고 했어요. 이 아이들이 기라성 같은 선배 자리를 완벽하게 메우더라고요.”

무명이던 홍명보·황선홍을 대표팀에 깜짝 발탁하셨죠.

“1990 이탈리아 월드컵 앞두고 최종수비수가 다쳐서 비상이 걸렸어요. 한 코치가 ‘고대 2학년에 홍명보라고 있습니다. 미드필더 보다가 수비로 내려왔는데 영리하고 잘합니다’ 그래요. 대표팀 허정무 코치도 보고 오더니 ‘괜찮은데요’ 하는 겁니다, 기술위원회를 소집했는데 위원들이 ‘듣보잡 선수를 동북고 후배라서 뽑으려고 하느냐’고 난리가 났어요. 무릎만 안 꿇었지 사정사정했죠. 뽑은 뒤에는 초청경기부터 월드컵 끝날 때까지 한 번도 안 빼고 주전으로 기용했지요.”

중앙정보부가 만든 ‘양지’팀서 뛰기도

지금 홍명보 팀에 대해 걱정이 많은데요.

“누가 해도 걱정이죠. 지금 대표팀이 그 수준밖에 안 돼요. 손흥민은 확실히 순발력이 떨어졌고, 이강인? 잘하는 거 아는데 기복이 심해. 컨디션이 나쁘면 빨리빨리 주면 되는데 그냥 잡아 제치려고만 하니까…. 상대 진영 다 정리된 뒤에 주면 뭐 하냐고. 김민재는 잘 하다가도 골과 직결되는 치명적인 실수를 가끔씩 하고. 그리고 결정적으로 양쪽 풀백이 약해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요. 월드컵 본선이 8개월 밖에 안 남았는데.

“대표팀은 선수들을 가르치는 데가 아니잖아요. 가장 컨디션 좋은 선수를 뽑고, 가장 적합한 전술을 선택해야죠. 무엇보다 지도자와 선수, 선수와 선수 간에 마음이 통할 수 있도록 홍 감독이 역할을 해 줘야 합니다. 그리고 힘들 때일수록 믿고 기다려 주는 게 필요하죠. 월드컵을 같이 뛴 동료가 ‘당장 내려와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면 되겠습니까.”

최근 프로축구 울산 HD를 맡았던 신태용 감독이 선수들과 불화 끝에 두 달 만에 경질됐다. 베테랑 이청용은 골을 넣은 뒤 신 감독을 조롱하는 듯한 ‘골프 세리머니’를 했다. 이 회장은 “(감독이 시즌 중에) 골프를 칠 수도 있어요. 중요한 건 선수들한테 신뢰를 얻느냐죠”라고 했다.

그는 자신의 경험을 들려줬다. “나도 포항제철 있을 때 청주상고파-한양대파 하면서 선수들끼리 반목하는 바람에 우울증에 걸릴 정도였어요. 그럴 때일수록 감싸 안고 뭐라도 하나 더 해주려고 노력했죠. ‘내가 이 사람을 쫓아가면, 성장하고 성공할 수 있겠구나’ 하는 믿음을 주는 존재, 그게 리더 아닙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