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녹음이 우거진 숲속 정령 토토로, 악마 캘시퍼가 움직이는 하울의 성, 이름을 잊게 되는 유바바의 온천장까지. 기묘하고 아름다운 상상의 세계를 펼쳐 온 일본의 2D 애니메이션 명가 지브리 스튜디오가 올해로 설립 40주년을 맞았다.
챗GPT에 ‘지브리풍’을 요청하면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84)이 손수 그린 그림을 흉내 낸 이미지가 클릭 한 번에 출력되는 시대다. 카카오톡 프로필에 지브리풍 변환 사진을 올리는 게 유행처럼 번진 것은 지브리 애니메이션의 대중적 인기를 방증한다. 그리고 그 인기는 단순히 ‘예쁜 그림체’에서 온 것이 아니다. 지브리 스튜디오가 40년간 다져온 작품 세계를 돌아볼 수 있는 영화·전시회가 한국을 찾는다.

“저는 운이 좋은 사람입니다. 종이와 연필, 필름으로 영화를 만들 수 있는 마지막 시대에 참여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또 제가 영화를 만든 지난 50년간 우리나라(일본)가 전쟁을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2014년 제87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공로상을 받은 미야자키 감독의 수상 소감이다. 수작업에 익숙한 애니메이터이자 평화주의자인 그의 면모를 잘 보여준다. 오는 28일 개봉하는 영화 <미야자키 하야오: 자연과 영혼>(레오 파비에 감독)은 미야자키 감독의 여러 인생관이 작품에 어떻게 반영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전기 다큐멘터리다. 감독의 장남 미야자키 고로, 스튜디오 지브리 대표이사 스즈키 토시오 등이 인터뷰에 응했다.
다큐멘터리에서는 거장으로 인정받기 전, 현대사의 풍파 속에서 꿈을 키워낸 청년 미야자키를 만나볼 수 있다. 1941년 도쿄에서 태어난 미야자키는 군용 비행기 부품을 납품하던 가문에서 부유하게 자랐다. 4살 무렵 소도시 우쓰노미야시에서 공습을 겪으며 자신이 살던 거리가 불타오르는 것을 본 기억은 그에게 마음속 화인을 남겼다. 이유 불문 전쟁에 반대하는 마음과, 전쟁으로 자신의 가족이 부를 축적했다는 부채감이 바로 그것이다. <붉은 돼지>(1992)와 <하울의 움직이는 성>(2004) 등 다수의 작품이 전쟁을 배경으로 음울한 분위기를 띠는 건 그 영향이다.

미야자키 감독은 ‘인간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라는 주제를 작품에서 풀어내곤 한다. 특히 자연과의 관계 회복을 영화로 이야기했다.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1984)와 <원령공주>(1997)에는 자연의 편에서, 오염을 일삼는 인류와 싸우는 히로인이 등장한다. <이웃집 토토로>(1988)에서는 녹나무에 사는 정령 토토로를 중심으로, 인간과 자연의 공존을 동화적으로 그려냈다.
자연에 명확한 결말이 없듯, 그의 이야기는 한마디로 요약되지 않는다. “한때는 작품 내 갈등을 해결하려 했지만, 영화만으로 사회 문제를 풀 수 없다는 걸 이젠 알고 있다”는 미야자키 감독의 인터뷰는 방향을 제시하기보다 질문을 던지는 그의 작품들의 모호성을 이해하는 열쇠가 된다.
<미야자키 하야오: 자연과 영혼>은 이와 같은 미야자키 감독의 인터뷰 영상과 수필집의 글을 영화 속 장면과 교차해, 미야자키라는 인물의 삶과 작품 사이의 연결점을 보여준다. 이를테면, 미야자키의 유년시절 그의 어머니는 9년여간 결핵균이 척추에 침투하는 질환으로 병상에 있었다. 미야자키는 ‘아버지, 형제들과 살면서 어머니가 세상을 떠날까 두려워했다’는데, 이는 어머니가 병원에 입원해 있는 <이웃집 토토로> 속 주인공 자매의 상황과 닮은꼴이다.

다큐멘터리는 고전이 되어 버린 지브리 애니메이션 뒤에 한때 청년이었고, 이제 거장이 된 인물의 삶이 녹아 있다는 것을 되새기게 한다. 작업실 구석진 자리에서, 구부정한 자세로 한땀 한땀 그림을 그리는 미야자키 감독의 뒷모습이 오래 기억에 남는다.
매일 작업실에서 그림을 그린다는 그는 “라멘 가게가 같은 맛을 유지하려는 것과 영화를 만드는 일 사이에는 같은 정성이 흐른다”고 말한다. ‘지브리풍’을 구축하고, 그 가치를 잃지 않기 위해 그가 들인 꾸준한 노력을 보여주는 말이다. 감히 측정하거나 대체될 수 없는 거장의 영혼을 생각하게 하는 영화다.

지브리의 초창기가 궁금하다면
다큐멘터리로 스튜디오 지브리를 더 탐구하고픈 마음이 들었다면, 다음 달 6일부터 용산아이파크몰 팝콘D스퀘어 대원뮤지엄에서 열리는 전시 <아니메쥬와 지브리전>에 가볼 만하다. 아니메쥬는 미야자키 감독이 만화를 연재했던 일본의 유명 애니메이션 잡지다. 일본 13개 도시 및 대만을 순회하며 큰 인기를 얻은 이 전시는 스튜디오 지브리의 초기 작품의 탄생과정을 담은 원화, 설정 자료, 콘티 등으로 꾸려진다.

전시회와의 협업으로, 극장에서는 대원미디어와 배급사 NEW가 준비한 ‘스튜디오 지브리 기획전 3부작’이 관객을 기다리고 있다. 3부작의 시작으로, <바람계곡의 나우시카>가 다음 달 25일 재개봉한다. 황폐해진 지구에서 자연과 인간의 공존을 꿈꾸는 소녀 나우시카의 사투를 그린 영화는 미야자키 감독이 1982년부터 13년에 걸쳐 <아니메쥬>에 연재한 만화를 원작으로 한다. 이 영화가 국내 관객을 찾는 건 2000년 한국 개봉 이후 25년 만이다.
이후 <원령공주>, <천공의 성 라퓨타>(1986)가 차례로 재개봉한다. 지브리 스튜디오는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의 흥행을 계기로 설립됐는데, 이후 스튜디오의 색을 확립한 작업물을 극장 스크린에서 다시 볼 기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