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급’의 학습과 내재화

나쓰메 소세키의 장편소설 『산시로(三四郞)』(1908)는 도쿄제국대학에 입학하게 된 주인공 산시로가 구마모토에서 도쿄행 기차 3등석에 타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맞은편 좌석의 수염을 기른 중년 남성은 지적인 말본새나 생김새로 보아 고등학교 교사 풍으로 비쳤지만, ‘3등석에 탄’ 것으로 미루어 보면 대수롭지 않은 사람일 거라고 이내 생각을 바꾼다. 아랑곳하지 않고 중년남은 시종 냉소적인 말투로 시국 비판을 늘어놓는다. “일본인들이 서양인에 비해 이런 볼품없는 몰골을 하고서는 아무리 러일전쟁에 이겨서 일등국이 되었다 한들 아무 소용없지. 건축물이든, 정원이든 이 한심한 몰골과 다를 바 없다네. 후지산 말고는 자랑할 거라곤 도통 없으니까 말이야.” 일본의 문명이 서양보다 나을 것은 하나도 없는 처지에 ‘일등국’ 운운하는 세태를 비판하는 대목으로 읽힌다.
서양 중심 문명 등급론 적극 수용
계급·인종 등의 우열로까지 확대
청일전쟁을 ‘문명 대 야만’ 포장
주변국 침략을 문명화로 정당화
일등국 집착 끝내 전쟁으로 귀결
지금도 선진·후진국 어휘에 잔영

무엇보다도 이 묘사는 ‘3등석’, ‘1등국’과 같이 수치로 나타나는 등급의 사고가 이미 20세기 초 일본인들에게 내재화되어 있었음을 보여준다. 1872년 개통된 기차는 설비 및 서비스의 수준에 따라 상등, 중등, 하등으로 나뉘었다. 대체로 상등석은 하등석 요금보다 4배 정도 비쌌다. 당연히 세도가를 비롯하여 고위직, 부유한 자산가 등이 상등석을 이용했다. 상등차는 정원이 18명, 중등차는 26명, 하등차는 52명이었다. 하등차의 여건이 어느 정도 열악했는지를 보여주는 수치이다. 영국에서 도입한 철도를 통해 일본인들은 3단계 등급체계를 시대 규범으로 받아들이며 근대라고 하는 시간을 경험하고 학습했다. 일본철도의 3등급 객실체계는 1960년대 말에 2등급 체계로 바뀔 때까지 근 100년간 유지되었다.
1830년부터 여객 철도를 운영하기 시작한 영국은 객실을 3등급으로 나눴다. 불결하고 교양 없는 하층민과 섞이고 싶지 않은 상류층의 의중이 반영된 결과이다. 산업혁명 과정 속에서 영국에서는 점차 상류, 중류, 하류(노동자층)로 이루어진 계층의식이 정착되었다. 기차와 여객선 등 장거리 대량운송수단이 3단계 등급을 채용한 것은 계층화된 수요를 반영한 것일 뿐만 아니라, 영업전략 면에서도 수익을 극대화할 수 있는 방안이었기 때문이다.
문명 사다리와 권력

영국 등 서구에서 정착된 3단계 등급 분류는 제국주의와 결부되면서 유럽 중심의 세계관을 전파하는 도구가 되었다. 예를 들면, 동물학자 조르주 퀴비에, 지리학자 말테 브룬은 제1인종은 백인, 즉 코카서스인종이고, 제2인종은 황색의 몽골인종, 제3인종은 흑인으로 보았다. 헨리 토마스 버클, 프랑수아 기조 등 역사학자들은 문명의 발전을 미개, 반개화, 문명의 3단계로 규정하고 유럽이 가장 높은 단계에 위치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견해들이 서구세력에 의한 비서구 세계 지배를 위한 유력한 도구로 활용된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그럼에도 일본은 서구 중심의 문명 등급론을 가장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나라이다. 예컨대, 퀴비에의 인종론은 이른 시기에 메이지 시대 지리 교과서에 그림과 함께 소개되었고, 문명 3단계로는 계몽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가 그의 주저 『문명론 개략』(1875)에서 자세히 설명했다. 그는 문명, 반개화, 야만의 3분류법은 모두가 인정하는 ‘세계의 정설’이라고 전제한 후, 유럽과 미국은 ‘최상의 문명국’, 터키, 중국, 일본 등은 반개화 상태, 아프리카 및 호주 원주민 등은 야만상태에 놓여있다고 했다. 후쿠자와는 문명, 반개화, 야만을 상대적 개념으로 파악했다. 중국이 서구에 비하면 반개화 상태이지만, 만일 비교 대상이 아프리카라면 중국은 문명국이 된다는 것이었다. 아울러 그는 진화론적 역사관으로 문명 개념을 파악했고, 향후 일본이 서양문명을 목표로 삼아 매진하면 문명국의 단계에 이를 수 있다고 믿었다.

중화주의 하의 중국인들이 서양의 문명단계론에 거부감을 감추지 않고 있던 사이에, 일본은 망설임 없이 서양세력이 깔아놓은 문명 궤도에 올라탔다. 그들에게 남겨진 과제는 열차의 앞쪽 칸을 향해 한 칸씩 전진하는 일이었다. 학문이 입신출세를 위한 사다리로 비쳤던 것처럼, 문명의 학습이야말로 인종의 한계를 극복하고 나라의 서열을 끌어올릴 수 있는 유일한 계층사다리로 인식되었다. 이렇게 해서 문명단계론은 일본 대중들의 정신을 동원할 수 있는 설득력을 확보했고, 나아가 근대일본인의 자기 정체성 형성에 중요한 한 축을 담당했다.
청일전쟁의 개전 직후, 후쿠자와는 청일전쟁은 문명국 일본이 문명화를 거부하는 고루한 청국을 교도(敎導)하는 ‘문야(文野)의 전쟁’이라고 선언했다. 즉 문명과 야만의 싸움이라는 것이다. 서양 제국주의에 대한 학습을 통해 후쿠자와는 ‘문명화’가 공격과 침략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강력한 대의명분이라는 것을 숙지하고 있었다. 이 무렵 그가 과거에 반개화국이라 했던 청이나, 조선을 ‘야만국’으로 격하하는 논설을 잇달아 발표한 배경은 명약관화하다. 위를 향한 계급상승 욕구는 아래에 대한 지배확대 욕구와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 후일 손문(孫文)은 일본인들의 대 아시아정책을 겨냥해서 “서양 패권주의의 사냥개가 될지, 동양 왕도의 간성(干城)이 될지는 일본인들이 신중히 판단할 일이다”라고 쏘아붙인 바 있다.
‘일등 국가’란 무엇인가
20세기 전반 대만에서는 일본인이 1등 국민, 오키나와인이 2등 국민, 대만인이 3등 국민으로 분류된 바 있다. 등위에 따라 임금체계가 달랐다. 일제강점기 한반도에는 1등 국민인 일본인과 2등 국민인 조선인이 존재했다. 일본제국의 종식과 함께 사라진 단어들이다. 그런데 일본어에 ‘일등국’이라는 단어도 있다. 조사를 해보니 러일전쟁 이후인 20세기 초부터 사용된 듯하다. 그 무렵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에서도 몇 차례 등장한다. 1910년에 발간된 소학교 교과서에도 ‘동양의 일등국’이라는 어구가 나온다. ‘일등국’은 영어 등 서양어로부터의 번역어가 아닌, 일본인들이 창안한 어휘이다. 그런데 일등국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어디에서 어디까지가 일등국인지 모호하다. 사전을 찾아보니 “국제관계 속에서 매우 우세한 지위를 점한 나라들을 막연히 지칭한 말”로 풀이되어 있다. 애써 순화된 표현을 사용하고 있지만 ‘국제관계에서 매우 우세한 지위’를 갖는 것은 식민종주국, 즉 제국주의 국가 이외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근대 일본이 올라탄 문명 열차의 맨 앞칸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영, 불, 독과 같은 최고단계의 문명국들이었고, 아프리카, 아시아 등지에 광대한 식민지를 거느린 제국주의 국가들이었다.

후쿠자와에 의하면 일본이 문명국이 되는 것은 서구열강으로부터 국가의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조건이었다. 따라서 ‘문명국’ 이후의 목표 설정이 필요했다. 문명 열차의 앞쪽을 향해 한 칸 씩 나아가다 더이상 전진할 수 없는 곳이 최종목표가 될 수밖에 없었고, 그곳이 곧 진정한 ‘일등국’의 자리였다. 그러나 국제연맹의 상임이사국의 지위에 올랐던 일본은 미, 영 등이 열강으로서의 지위를 인정하지 않는 데에 반발해 1933년에 탈퇴하고 고립노선을 택했다. 진주만 공습으로 태평양전쟁이 발발한 1941년 12월 8일, 널리 알려진 일본의 문학평론가 이토 세이(伊藤整, 1905~1969)는 일기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우리들은 백인 세력 중에서 제1등급의 국가와 싸우는 것 외에 세계 제1류 민족으로서의 자각을 확립할 수 없는 숙명을 지닌다.” 백인종 국가 중에서 가장 강대한 미국을 상대로 승리해야만 일본은 비로소 일등국 등극의 꿈을 구현할 수 있다는 취지이거니와, 그 결말은 주지하는 대로이다.
19세기 서양이 주도한 문명 등급화에 의해 세계의 질서가 형성되었고, 등급화의 숨은 목적은 자국 이익의 추구였다. 서양을 모범으로 삼아 문명화를 추진한 일본은 합리적이지도 정의롭지도 않은 문명 등급화를 확대 재생산했다. 그러나 현재의 우리는 불합리한 등급화 유제(遺制)로부터 자유로운가? 흔히 사용하는 선진국, 중진국, 후진국의 개념의 연원에 이르게 되면 문명, 반개화, 야만이라는 근대 문명 단계론과 마주치게 된다. 1, 2, 3 또는 상, 중, 하와 같은 등급성 어휘가 일상의 언어생활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접두어로 등장하는 야만의 시간은 현재도 이어지고 있다.
윤상인 전 서울대 아시아언어문명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