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콜로 마키아벨리는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의 정치사상가다. 그의 초상화 중 마키아벨리 직후 세대의 화가인 산티 디 티토가 그린 것이 유명하다. 이 초상화에서 마키아벨리는 엷은 미소를 띠고 있는데, 이 미소가 일품이다. 다빈치의 걸작 ‘모나리자’의 미소만큼이나 마키아벨리의 미소도 헤아리기 힘든 내면의 깊이와 미묘함을 드러내고 있다. 이 미소의 의미는 필경 마키아벨리의 정치사상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서로 다르게 파악될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이른바 ‘마키아벨리주의’의 창시자로 간주된다. 그의 정치사상은 통상 권모술수의 정치로 해석된다. 그런 맥락에서 마키아벨리의 정치적 주장은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거나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말로 거칠게 요약되곤 한다. 이런 해석에서 보자면, 마키아벨리의 미소는 ‘찬웃음’이다. 즉 마키아벨리의 미소는 자신의 권력과 이해관계를 위해서는 정적을 잔인하게 제거하고 국민을 태연하게 기만하는 냉혈한 정치인의 냉소적 웃음이다. 그러나 마키아벨리를 음험한 책략가로 보는 해석에는 함정이 하나 있다. 그렇게 해석하면, 마키아벨리는 자신의 책략을 모두 사전에 노출한 순진한 마키아벨리주의자가 된다. 즉 그는 군주들의 술수를 솔직하게 드러내버림으로써 스스로 마키아벨리주의에서 멀어진 셈이다.
그렇기에 마키아벨리를 단지 권력 기술자로서 군주의 은밀한 조언자로 보는 해석은 한계가 있다. 오히려 그는 공공연하게 새로운 군주의 사명과 역할을 강조했다. 이 말은 곧 마키아벨리가 낡은 군주를 대신할 새로운 유형의 지도자를 갈망했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 지도자가 당시 분열된 이탈리아를 통일하고 이탈리아 민중을 이끌어주기를 열렬히 희망했다. 그러나 이탈리아의 현실은 마키아벨리의 그런 진지한 바람과는 완전히 동떨어져 있었고, 그는 이런 쓰라린 현실에 절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해석에서 보자면, 마키아벨리의 미소는 ‘쓴웃음’이다.
이런 해석을 극한까지 밀어붙일 수 있다. 마키아벨리가 정말로 권모술수의 정치가였다면 자신의 권모술수를 솔직하게 드러내기보다는 숨겼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군주론>에는 힐끗 읽어만 봐도 그런 정치적 기술들로 가득하다. 여전히 그는 자신의 책략을 미리 노출한 엉성한 책략가처럼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마키아벨리가 군주의 책략을 일부러 노출했다고 볼 수도 있다. 즉 군주의 조언자인 척했으나, 이는 위장이었고 실은 군주의 비밀을 시민과 민중에게 누설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마키아벨리를 은밀한 공화주의자로 보는 해석은 스피노자와 루소, 그람시 등 여러 사상가들에 의해 꾸준히 제시됐다. 시인 포스콜로의 말마따나, “그는 비스듬히 글을 썼다”. 이런 해석에서 보자면, 마키아벨리의 미소는 시민과 민중의 편에서 군주를 조롱하는 ‘비웃음’이다.
이렇듯 여러 겹 의미가 쌓여 있는 웃음은 그냥 웃음이 아닐 수도 있다. 가령 ‘찬웃음’은 단순한 근육의 일그러짐이다. 그것은 무심함이나 나쁜 마음의 표현일 뿐이다. 철학자 베르그송은 형식이 본질을, 수단이 목적을 망각할 때 웃음이 나온다고 했다. 예컨대 의사나 법관이 공중의 건강과 정의보다는 자신들의 직업이나 이를 감싸고 있는 형식에 집착할 때가 그런 경우다. 이는 마키아벨리의 ‘비웃음’에도 적용된다. 즉 군주가 시민과 민중을 위하기는커녕 오히려 시민과 민중이 군주를 위해 존재하는 전도된 상황이 어이없는 웃음을 자아낸다. 이 ‘비웃음’은 본말이 뒤바뀐 상황에 대한 징벌, 상황을 바로잡으라는 요구다. 끝으로, ‘쓴웃음’도 웃음이 아니다. 정치학자 마우리치오 비롤리에 따르면, 마키아벨리의 미소는 통치자들이 신민들을 폭력과 굴욕, 빈곤으로부터 보호해주지 못하는 세상의 부정의와 부조리에 대한 분노를 숨기고 있다. 즉 마키아벨리는 웃고 있지만 실은 울음을 참고 있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