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대통령 후보들의 경제 공약은 솔직히 뻔하고 지루하다. 경제 살리기다. 물가 안정, 주택 공급, 일자리 창출, 반도체 투자, 재생 에너지, 디지털 전환과 같은 용어가 다시 한번 반복될 것이 분명하다. 그중 몇몇은 시대 흐름에 따라 단어만 바뀌었을 뿐, 10년 전에도, 20년 전에도 들었던 말이다.
경제를 살리려면 왜 경제가 죽었는지에 대한 올바른 분석이 선행돼야 한다. 여러 대내외적 요인이 있겠지만, 유독 우리나라에만 두드러지는 요인이 있다. 바로 ‘경제 주체 간의 불신’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경제를 가능하게 하는 사회적 기반으로서의 신뢰, 그리고 그것을 침식시키는 ‘사기 범죄’에 대한 국가의 구조적 무감각이다.

대한민국은 겉보기에는 치안이 좋은 나라다. 밤길이 안전하고, 공공장소에 물건을 두고 잠시 자리를 비워도 대부분 돌아온다. CCTV는 도시를 촘촘히 감시하고, 경찰은 빠르게 도착한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범죄가 없는 사회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2023년 경찰청 범죄통계에 따르면, 전체 범죄 발생 건수는 약 152만 건이며, 인구 10만 명당 발생 건수는 2961건에 이른다. 그중 지능범죄가 842.7건으로 가장 비중이 높고, 사기 범죄는 전체 범죄 중 약 19%를 차지했다. 물리적 범죄는 줄었지만, 사기라는 형태의 신뢰 파괴는 빠르게 늘고 있다. 복잡다단한 디지털 범죄는 아예 입법이 따라가기조차 버거울 정도다.
문제는 이 사기 범죄에 법과 제도가 지나치게 관대하다는 데 있다. 피해 금액이 수억 원에 이르러도 실형 없이 집행유예로 끝나는 일이 다반사다. 초범이라는 이유, 피해 회복 시도라는 이유, 반성문 제출이라는 사법적 제스처에 따라 형량은 낮아진다. 법은 늘 피고인의 사정을 먼저 살핀다. 피해자는 배경으로 밀려나고, 법정에서조차 “왜 그런 걸 믿었느냐”는 식의 질문으로 피해자에게 두 번 상처를 준다. 범죄로 삶이 무너진 데 이어 피해를 자초한 것처럼 취급당하는 이중 고통이 더해진다.
이건 단지 형벌의 문제가 아니다. 경제 정책의 문제다. 한 사회의 경제는 신뢰 위에 세워진다. 금융거래, 소비활동, 투자 판단, 고용계약, 플랫폼 기반 거래 이 모든 것은 결국 ‘상대방이 나를 속이지 않을 것’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이 전제가 무너지면 사람들은 지갑을 닫고, 기회를 포기하고, 관계를 끊는다. 탈신뢰의 흐름은 가장 먼저 중산층과 서민을 덮친다. 최근 급증한 투자 사기, 코인 사기, 기획부동산 사기, 보이스피싱 등은 기술의 겉모습을 활용해 취약계층을 공략한다. 정책 밖에 있는 사람들, 제도에 익숙지 않은 사람들, 디지털 리터러시가 낮은 사람들부터 무너진다. 그들은 다시 일어서기 어렵고, 불신은 점점 더 많은 이들에게 전염된다. 이처럼 사기 범죄는 단지 개인을 무너뜨리릴 뿐 아니라 신뢰라는 사회 공동 자산을 좀먹는 집단적 침식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를 늘 개인의 문제로 치부해왔다. 대선 후보들의 경제 공약에도 이를 해결하려는 의지는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국가가 나서서 강력한 처벌을 하기는커녕 사기 피해자는 여전히 자신의 피해를 증명하고 증명받는 데 더 많은 시간과 자원을 소모한다. ‘경제’는 너무 자주 수치와 수식으로만 다뤄진다. 그러나 사람 사이의 믿음이 무너진 사회에서 숫자가 아무리 좋아진들, 체감하는 경제가 좋아질 리 없다.
다음 대통령이 진정한 경제를 이야기하고 싶다면, 이제는 ‘성장’과 ‘분배’의 낡은 프레임에 갇혀서는 안 된다. 신뢰를 회복하는 경제, 사기와 조작에 단호히 맞서는 시스템 경제를 설계해야 한다. 사기범죄에 대한 강력한 처벌, 피해자 보호, 반복 사기 근절을 위한 디지털 감시 체계, 그리고 범죄 수익을 실질적으로 환수하는 법제화가 실질적인 경제 공약의 범주에 포함되어야 한다. 투자자 보호 역시 증권시장에서만 다뤄져선 안 된다. 투자 사기를 사전에 감지하고 차단할 수 있는 국가적 감시망, 그리고 크고 작은 사기 사건에 대한 사회적 감시와 방지 인프라는 새로운 산업 전략 못지않게 시급한 과제다.
성장을 견인하는 것은 자본이지만, 그 자본을 흐르게 만드는 것은 사람 사이의 믿음이다. 이 기본을 방치한 채 어떤 국가 재정 지표나 산업 전략을 내세운들, 현실 경제는 움직이지 않는다. 다음 대통령에게 바란다. 치안은 거리를 지키지만, 신뢰는 경제를 지킨다. 요컨대 ‘얼마나 잘 키우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단호히 막아내느냐’에 달렸다.
봉성창 기자
bong@biz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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