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올해는 불기(佛紀) 2569년, 석가모니가 열반한 해를 기원 삼아 헤아린다. 80세에 사라 나무 밑에서 입멸한 후, 부처의 유해는 화장해 재와 사리가 8말이 나왔다. 이를 나눈 고대 인도 8개국은 각 수도에 큰 봉분을 만들어 안치했다. 마치 밥그릇을 엎어놓은 모양의 이 성스러운 무덤이 스투파(stupa)다. 한자로 음역하여 솔도파(率都婆), 탑파(塔婆)라 하다 ‘탑’이라 불렀다.
기원전 3세기 인도를 통일한 아소카 대왕은 불교를 국교로 삼았고 기존 스투파의 사리를 재분배해 인도 전역에 8만4000개의 탑을 세웠다. 북인도 내륙, 산치의 대 스투파는 아소카가 세운 것으로 가장 완벽한 형태의 유적이다. 산치는 대왕의 첫 아내인 데비의 고향으로 결혼식을 올린 장소이다. 인근에 100여 기의 고대 스투파들이 산재해 인도 최고의 다탑지대이기도 하다.

지름 37m, 높이 16.5m로 벽돌조 뼈대에 석재로 마감했다. 원통형 기단 위에 둥근 봉분을 쌓고 정상부에 원반을 중첩한 상륜부를 세웠다. 신앙 대상 주위를 시계방향으로 순행하는 고대 인도의 예법이 ‘요잡’인데 기단 위아래에 2중 요잡로, 이른바 탑돌이길을 마련했다. 상륜부는 여러 겹 양산을 씌워 존경을 표하는 또 다른 예법을 형상화한 것이다.
1세기경 후대의 슝가 왕조가 봉분 주위에 난간을 두르고 사방에 관문을 설치해 초기 불교의 상징과 교리를 섬세하게 조각했다. 특히 출생과 깨달음, 전법, 열반 등 부처의 생애를 묘사한 내용이 압권이다. 아직 불상이 출현하지 않은 무불상 시대로 보리수·발바닥·법륜·스투파 등을 부처의 상징으로 표현했다.
스투파는 불교 최고의 상징물로 아시아 전역에 전파 유행했다. 동남아는 뾰족한 파고다 모습으로, 중국은 고층 누각 건물로 다양하게 만들었으나 사방 대칭이며 하늘로 솟은 상징성은 공통적이다. 석탑의 나라 한국은 석탑 위에 인도 스투파를 축소해 얹었으니 스투파는 이 땅에도 부처의 몸으로 영원히 살아있다.
김봉렬 건축가·한국예술종합학교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