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가가 국제정세에 눈이 어두우면 국가의 운명이 뒤바뀔 수 있는데, 이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이러한 측면에서 17세기에 조선과 일본에 각각 표류한 외국인 '하멜'과 '애덤스'를 각국이 어떻게 다루었는지를 보면 매우 흥미롭고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래서 세상을 보는 눈이 중요한 것이다.
17세기 유럽은 동방진출을 위해 동인도회사를 설립하고, 중상주의와 함께 치열한 상업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항해사인 영국의 윌리엄 애덤스(William Adams)는 5척의 배와 함께 극동 지역을 항해하다가 애덤스가 탄 '리프데호'를 제외하고 나머지 배들은 나포, 침몰, 귀국하게 되었다. 1600년 '리프데호'는 일본 동쪽 가마쿠라 해변에 선원 20여 명과 함께 마침내 표착하게 된다.
이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이들이 해적이니 처형하자는 의견도 있었으나, 일본은 애덤스로부터 조선술을 익혀 대형선박을 건조했고, 기하학, 수학, 항해술 등의 서양 지식을 섭렵했다. 또한 가톨릭과 기독교의 차이, 영국은 어떤 나라인지 등 당시 서양세계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일본은 이러한 애덤스에게 미우라 해역에 영지를 하사하고 저택도 마련해주었다. 애덤스는 서양인으로서는 최초로 '사무라이'가 되었고, 외교고문으로도 활동하며 외국과 무역교류의 기회를 활짝 열었다. '미우라 안진'은 애덤스의 일본 이름이다. 이후 일본은 네덜란드 신학문이자 신지 식인 난학(蘭學)을 받아들이며 당시 최신 과학기술을 비롯한 서양문물을 흡수하면서 근대화에 박차를 가했다. 이러한 개혁은 마침내 메이지유신으로 이어지며 일본의 운명이 바뀌게 된다.
그렇다면 조선에 표류한 '하멜'은 어떻게 되었을까? 1653년 일본으로 향하던 네덜란드 상인 배가 폭풍을 만나 제주도에 표착을 하게 되는데,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항해사인 핸드릭 하멜(Hendrik Hamel)은 36명의 생존자 중 한 명이었다. 조선에 온 하멜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하멜 표류기》를 통해서 알 수 있는데, “13년 28일 동안 우리는 광대처럼 춤을 추었고, 땔감을 구했고, 풀을 베었고, 담장을 만들었고, 논에 물길을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멜은 고된 노역과 생활고에 지칠 대로 지쳐 1666년 마침내 억류 생활에서 목숨 건 탈출을 시도해 일본으로 건너갔다. 하멜 일행으로 당시 조선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국제 정세를 파악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조선에서는 전남 강진, 여수 등지로 하멜 일행을 쫓아내지 않았는가? 조선은 국제정세에 소위 '까막눈'이 되었고, 중화사상과 쇄국 이데올로기에 갇힌 조선의 운명은 그야말로 세계 흐름과 거꾸로 가고 있었다. 애덤스와 하멜의 운명은 곧 일본과 조선의 운명이었으니, 국제정세와 교류, 개방이 양 국가의 운명을 갈라놓았다.
지구촌으로 눈을 돌려보자. 지금 전세계는 긴박한 국제정세속에서 가히 소리없는 총성 ! 산업전쟁을 치루고 있는 가운데, 패권을 잡기 위한 치열한 각축전이 전개되고 있다. 그 만큼 경쟁구도와 국가순위가 언제든지 뒤바뀔 수 있는 중차대한 시기이다. 이러한 시점에 우리가 '조선'의 우遇를 범하고 있는 것은 없는지, 위대한 대한민국의 미래청사진과 국가전략속에서 역사의 교훈을 되새기며, 주도면밀하게 살펴보아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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