흡사 사회단체나 노동조합의 성명서 같기도 한 말들이 대통령의 입에서 쏟아져나왔다. 정부 부처가 움직이는 속도도 예사롭지 않았다. 대통령이 지게차에 묶인 이주노동자의 영상을 언급하자 고용노동부가 고용허가제 개선 방안 검토를 시작했다. 반복되는 산업재해 사망사고를 언급하자 법무부와 금융위원회까지 거들며 방책을 내고 기업 임직원이 넙죽 고개를 숙였다. 스토킹 피해 신고로도 막지 못한 여성 살해 사건을 언급하자 경찰은 접근금지 대상자를 전수조사하겠다고 나섰다. 힘없는 사람들도 조금은 사람대접받으며 사는 세상이 오려나 기대가 모이기도 한다.
정작 내 마음은 그리 설레지 않는다. 그 속도나 밀도는 남다르지만 낯설지 않은 풍경이라서다. 어떤 사건에 사회적 이목이 쏠리면 조사, 감독, 검토, 대책 강구와 같은 것들이 한 차례 휩쓸고 간다. 하지만 유사한 상황과 사건은 기어이 찾아온다. 정부의 분주함에 진심이나 의지가 부족한 탓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변화가 시작되는 곳을 자꾸 놓치기 때문이다. 세상의 많은 문제들은 강자가 제 유리한 위치를 빌려 약자에게 횡포를 부리는 구도로 드러난다. 그래서 강자의 횡포를 금지하거나 처벌하는, 때로는 어르고 달래는 것이 해법으로 보인다. 약자가 부조리한 상황에 대처할 힘을 증강하는 데는 별 관심이 없다. 인권침해가 발생한 사업장을 열심히 규제해도 이주노동자가 사업장을 옮길 자유는 주지 않는 식이다. 대책은 실패하고 문제는 반복된다.
“소수자, 약자에 대한 용납할 수 없는 폭력”에 대통령이 분노하는 것의 정치적 의미는 작지 않다. 하지만 용납할 수 없는 폭력은 갑자기 튀어나오지 않는다. 납득할 수 없는 차별과 무시와 강요가 다반사인 일상이 전후좌우에 있다. 괴롭히지 말라는데 멈추지 않고 다시 연락하지 말라는데 집 앞까지 찾아온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 그만하라고, 가라고, 멈추겠다고, 입속에서 몇번이나 연습한 말을 주저앉히는 것이 눈앞의 상대만은 아니다.
이주민에게는 민생회복 소비쿠폰을 지급하지 않는다는 정부 방침, 직장 내 괴롭힘 의혹이 있는 정치인의 장관 후보자 지명 같은 것들이 모두 신호가 된다. 세상은 네 편이 아닐 거라고, 말해도 크게 달라지지 않을 거라고, 말하는 네가 불리해질 거라고. 다른 신호가 필요하다. 당신이 사람으로 동등하게 대접받지 못한다고 여긴다면 언제든 기꺼이 말하라는 신호.
이재명 대통령이 소수자와 약자의 처지에 관심을 기울이면서도 차별금지법에 대해 말하지 않는 것이 내게 그리 어색하지는 않다. 민주당은 차별금지법 발의를 철회하거나 회피할 때도 혐오표현방지법은 곧잘 발의했다. 혐오표현과 차별이 서로 강화하는 관계에 있다는 점에서 두 법은 궁극적으로 유사한 목표를 향한다. 보수 개신교의 반발을 산다는 점에서도 별 차이는 없다. 하지만 누구의 권한을 강화하느냐에 차이가 있다. 혐오표현방지법은 방송통신심의위원회와 같은 공적 기구에 혐오표현을 규제할 권한을 준다. 차별금지법은 누구든 차별을 당했다고 여기는 사람이 그 부당함을 주장할 권한을 준다. 추진할 결심이 다른 이유는 보수 개신교 눈치 보기로만 설명되지 않는다. 민주당은 약자가 더 크게 더 많이 말하는 세상보다 약자를 대신해 자신들이 말하는 세상이면 충분한 듯싶다.
약자는 약한 자가 아니다. 약한 위치에 내몰리는 사람들이다. 나 같은 사람은 어쩔 수 없다고 느끼는 동안은 나를 숨기고 말을 참고 세상을 쫓아가는 것이 자신을 지킬 방법이 된다. 하지만 나 같은 사람이 자꾸 당하는 이유가 내게 있지 않음이 자명해지는 어떤 순간이 오고야 만다. 나를 내모는 세상을 그대로 둘 수 없게 되고 저마다 속도는 다를지언정 멈출 수 없게 된다. 변화는 언제나 약자로부터 시작된다. 이재명 대통령이 “힘없고 곤궁한 처지에 있는 이들을 대하는 태도가 사회의 품격을 보여준다”고 했다. 나는 다르게 생각한다. 힘없고 곤궁한 처지에 있는 이들이 얼마나 소란을 일으킬 수 있는지가 사회의 품격을 보여준다. 차별금지법은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선언을 계속 환기하며 약자의 시선과 목소리로 세상을 점검하고 고쳐가자는 법이다.
다음주면 이재명 정부의 국정과제가 발표될 것으로 예상된다. ‘차별금지법 제정’이 보이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납득할 수 있을까? 지난겨울을 거치며 차별금지법 없는 세상에 머무를 수 없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졌다. 차별금지법을 만들지 말지 논의할 시간은 지났다. 이제 어떤 차별금지법을 만들지 사회적 논의를 시작하자. 언제나 그렇듯 약자들은 이미 시작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