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문제 없는 인생이
과연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모두의 삶에는
나름의 문제가 있습니다.
저는
그 문제로 인해
우리가
자유롭고,
지혜로워진다고
생각합니다.
왜냐고요?
문제를 품고서 골똘히
궁리하고,
궁리하고,
궁리하는 과정을 통해
솔루션을 얻기 때문입니다.
그게 결국
삶에 대한
깨달음입니다.
궁리하고 궁리하면
통하고 통합니다.
‘백성호의 궁궁통통2’에서는
그런 이치를 담습니다.
#궁궁통1
절집에서
‘사찰음식의 대장’으로
불리던 스님이
계셨습니다.
조계종에서
비구니 스님
아무나 잡고 물어봐도
하나같이
이분을 꼽았습니다.

10년 전이었습니다.
당시 그분은
지리산 자락의
사찰에 계셨습니다.
저는
서울에서
차를 타고
지리산을 찾아갔습니다.
왜냐고요?
궁금했거든요.
요즘은
사찰음식이
꽤 인기잖아요.
넷플릭스를 통해서
해외에도 소개되고
외국의 유명 셰프들이
한국의
사찰음식을 찾아서
절집을
찾아오기도 하잖아요.
서울의
사찰음식 전문점에 가면
메뉴 구성이
아주
화려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궁금했습니다.
옛날에는
어땠을까.
‘사찰음식의 대모’께서 보시는
사찰음식이란
과연
어떤 걸까.
사찰음식에 담긴
정신이랄까,
아니면
철학이랄까.
그건
대체 무엇일까.
그런
궁금증을 풀고자
서울에서
지리산으로
내려갔습니다.
#궁궁통2
지리산 자락의 사찰은
경남 산청의
대원사였습니다.
석남사(울산)·수덕사 견성암(예산)과 함께
대표적인
비구니 참선도량입니다.
사찰음식과 템플스테이로도
유명한 곳입니다.
그곳에
‘사찰음식의 대장’으로
불리는
성우 스님이 있었습니다.

산을 넘고
굽이굽이 계곡을 돌아서
대원사로 갔습니다.
절로 들어가는
대문 격인
일주문에는
‘방장산 대원사’라고
적혀 있더군요.
산청 일대에서는
지리산을
‘방장산(方丈山)’이라고
불렀습니다.
불교에서는
총림의 최고 어른을
‘방장’이라고
부르잖아요.
그러니
‘산중의 대장’이란
뜻입니다.
당시
성우 스님은
93세였습니다.
말씀도 잘하시고
아주 정정했습니다.
식사 시간을 빼면
거의
참선과 독경으로
하루를 보낸다고
했습니다.
성우 스님은
1943년 일제 강점기 때
출가했습니다.
그때
절집 형편은
어땠을까.
또
사찰음식은
어떤 상황이었을까.
다른 곳에서
쉬이 듣기 힘든
이야기를
성우 스님께 물었습니다.
#궁궁통3
성우 스님은
어른이 되기 전에
수덕사 견성암을
찾아갔습니다.
일엽 스님의
상좌가 될
생각이었습니다.
여류 문인이었던
일엽 스님은
화가 나혜석과 함께
신여성의 대명사로
꼽히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보기 좋게
퇴짜를 맞았습니다.
출가하려면
부모님 허락을 받아서
오라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2년 후,
스무 살이 되어서야
성우 스님은
수덕사 견성암으로
다시
출가했습니다.

“말도 마라.
그때 절에는
먹을 것도 없었다.
양식이 없어서
절에 공부하러 오는 사람들
방부(안거 때 수행자를 받는 일)도
못 받았다.”
그렇게
거절을 당하면
수행하는 사람들이
다들 울면서
돌아갔다고 했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만공 스님(당시 수덕사 조실)이
가슴에 맺혀서
논을 조금 샀다고
하더군요.
수덕사 스님들이
그 논에서
직접 모를 심고
농사를 지었다고
했습니다.
그토록
식량이 모자랄 정도면
그때 절집에서는
스님들이
무엇을 먹었을까요.



![자연의 컬러로 완성한 리모와의 품격 [더 하이엔드]](https://pds.joongang.co.kr/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2511/21/441f6da6-1b1e-4eac-a5f1-f87147692a7a.jpg)


![[신간] 과학으로 풀어낸 전통 살림 도구... '살림의 과학'](https://img.newspim.com/news/2025/11/20/2511201221399190.jp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