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 칼럼] 공인노무사의 일탈? 거짓마저 무기가 되는 세상

2025-12-12

A씨도 처음엔 의심하지 않았다. ‘그래도 공인노무사인데 허위 판례로 답변서를 작성할까’ 싶었다. 하지만 답변서에 인용된 판례는 아무리 뒤져봐도 검색이 되지 않았다. 10건의 판례 모두가 그랬다. 아내를 부당해고한 사측 공인노무사의 답변서였기에 더 괘씸할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해당 지방노동위윈회도 이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거다. 그가 판례의 진위를 밝혀달라고 요청하고 나서야 비로소 위원도 이 문제를 인지했다.

해당 공인노무사의 답변은 더 가관이었다. 챗GPT로 판례를 찾은 행위는 인정하면서도 “사실관계를 조작하지 않았으니 고의나 허위는 아니”라고 했다. “인터넷 등에 유사한 판례가 막혀 있어 AI로 찾다 보니 사실관계에 부합하는 판례가 있어 이를 인용한 것”이라고 부연했다. 챗GPT의 잘못이지 이를 검색한 자신은 책임이 없다는 얘기다. 결국 부당해고는 인정됐지만, A씨는 허위 판례를 인용한 노무사의 행태를 조사해달라며 고용노동부에 민원을 제기한 상태다.

이 사건을 단순히 노무사의 윤리적 일탈이나 AI의 환각 문제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 환각이라는 거대언어모델의 기술적 미숙함 혹은 결함을 넘어 AI 시대에 권력이 어떻게 재배치되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이어서다. 사측을 대리하는 노무사는 해고의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해, 정확히는 해고가 정당해 보이도록 만들기 위해 AI 기술을 동원한 사례다.

AI 시대 권력은 강제나 강압이라는 전통적 방식이 아니라 예측과 유도의 순환 고리 속에서 작동한다. 그래서 더 은밀하다. 사측 노무사는 AI가 생성한 10개의 그럴듯한 판례를 들이밀며 ‘당신은 질 것이다’라는 예측을 주입하고, 구제신청 포기라는 결과를 유도하려 했다. 법률 지식에 취약한 노동자들은 이러한 문서상의 위협 앞에 통상 나약하고 무력해진다. 법률 용어와 전문성이 결합한 판례의 나열은 그 자체로 거대한 공포다. 절차를 더 진행해봐야 질 것이 분명해진다고 직감하면 소송을 이내 포기한다. 거짓 정보조차 전문가와 AI 기술의 외피를 쓰면 강력한 무기가 되는, 새로운 유형의 권력 작동 방식이라 할 수 있다.

기술은 태생적으로 정치적이다. 특히 AI를 가진 자가 누구를 향해 사용하는가에 따라 권력의 작동 방향이 결정된다. 기술은 더 많은 비용을 지불하는 이들에게 더 정교하고 더 수준 높은 맞춤화 기술을 선사한다. 노무사를 위한 AI 시장도 다르지 않다. 고도화된 유료 노무 AI 서비스를 구매할 여력이 있는 쪽은 노동자보다는 사측일 확률이 높다. 그들을 위해 복무하는 AI는 해고를 정당화하고, 부당행위를 합리화한다.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법률적 근거를 치밀하게 직조해준다. 반면 노동자들은 AI 경쟁에서 열위에 놓인 보편적 제품을 사용하거나, 방어수단 없이 맨몸으로 AI 기술의 공격을 받아내야 한다.

AI를 가진 자가 누구를 향해 쓰느냐라는 질문은 더 이상 감정적 비판이 아니다. 그것은 기술이 언제나 권력 관계 속에서만 작동해왔다는 역사의 축적된 결론이다. AI는 새로운 문제가 아니라 오래된 권력 비대칭을 가장 정교한 형태로 재현한 최신 기술일 뿐이다. AI가 기득권의 증폭에 활용되는 수위만큼 약자의 대항력은 점차 줄어들 수밖에 없는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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