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아들…시진핑이 뤄양에 간 까닭은

2025-06-02

“당의 이익이 최우선이다.”

지난해 찾아갔던 중국 산시성 푸핑에 조성된 시중쉰(習仲勳· 1913~2002)의 묘소에 놓인 비석에서 본 문구다. 1943년 중국공산당의 본거지 옌안에서 열린 표창 행사에서 마오쩌둥이 수상자 시중쉰에게 건넨 필체 그대로였다. 묘소 요원의 저지로 사진은 못 찍었다. 같은 제목으로 그의 첫 영어전기가 곧 출판된다.

지난달 19일 시중쉰의 아들인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허난성 뤄양(洛陽·낙양)의 베어링 공장을 찾았다. 시 주석은 “우리는 실업 발전을 견지했다”라며 “과거 성냥·비누·양철 등을 수입에 의존했지만 지금은 모든 공업 분야를 가장 완벽하게 갖춘 세계 제조업 1위 대국이 됐다. 이 길이 옳았다”라고 소회를 밝혔다.

뤄양은 시중쉰의 애환이 서린 도시다. 1958년 마오는 영국과 미국을 넘어서겠다며 철강 생산을 독려했다. 대약진 운동이다. 농업은 뒤로 밀렸고 수천만이 굶어 죽었다. 이듬해 장시성 루산(廬山·여산)에서 정치국 확대회의가 열렸다. 펑더화이가 마오를 비판했다. 마오는 즉각 반격했다. 당시 국무원 부총리였던 시중쉰은 펑에 동조하며 침묵했다. 시중쉰도 얼마 뒤 반당집단으로 몰렸다.

1965년 12월 당은 시중쉰을 뤄양의 광산기계공장으로 하방했다. 이듬해 문화대혁명이 시작됐다. 1967년 1월 홍위병 무리가 몰려왔다. 시중쉰을 시안으로 끌고 가 1년여를 조리돌렸다. 1968년 문혁 사인방은 베이징으로 호송해 투옥했다.

1975년에야 베이징 감옥에서 풀려난 시중쉰은 부인과 함께 다시 뤄양의 내화 재료공장으로 하방됐다. 지난 2013년 시중쉰 탄생 100년을 기념해 중국중앙방송(CCTV)이 제작한 다큐멘터리에 가족들이 당시의 참상을 증언했다.

뤄양 시찰 이후 12일째 시 주석의 공개활동이 없다. 5월 월례 정치국회의도 개최 여부를 관영 매체가 보도하지 않았다.

시중쉰 영문전기를 쓴 조셉 토리지안 미국 스탠퍼드대 후버연구소 연구원은 이렇게 적었다. “어떤 이들은 왜 시진핑이 자신의 아버지를 극심하게 탄압했던 조직에 그토록 헌신적인지 궁금해할지 모르지만, 더 나은 질문은 아버지가 그토록 희생을 치른 당을 아들이 과연 배신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라고 했다. 아버지는 당을 애정했다.

이런 일화들도 전한다. 치아가 불편해진 70대 시중쉰은 반쯤 먹던 갈비를 30대의 아들에게 마저 먹게 했다. 아들은 주저하지도 불평도 없이 먹었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목욕을 마친 물로 하는 목욕도 다반사였다. 2025년 뤄양 이후의 이야기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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