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메리카다!” 1620년 11월 21일, 영국 범선에 탄 한 청년은 멀리 보이는 육지를 가리키며 소리 질렀다. 미국의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는 순간이다. 이 배는 신천지 미국으로 이주해 살기 위해 영국을 떠나온 102명의 ‘순례자(Pilgrim)’를 태운 메이플라워호였다.
월든 연못을 떠나 보스턴 시내를 거쳐 남서쪽으로 100㎞를 달려가면, 플리머스라는 작은 어촌마을이 나타난다. 마을의 끝인 바닷가에는 커다란 범선이 정박해 있다. 400여 년 전 아메리카 대륙에 백인 정착민들을 태우고 온 메이플라워호를 재현해 놓은 것이다.

유럽인들이 신대륙에서 살기 위해 식민지(colony)를 세운 것이 메이플라워호가 처음은 아니다. 영국은 1607년 버지니아주에 당시 왕이었던 제임스 1세의 이름을 딴 제임스타운을 짓고 104명을 이주시켰다. 이것이 유럽인의 신대륙 첫 이주였다. 메이플라워호도 원래의 목적지는 버지니아주였지만, 강한 폭풍 때문에 플리머스에 머물러야 했다. 하지만 우리는 유럽인의 신대륙 이주라 하면 제임스타운이 아니라 메이플라워호를 생각하게 된다.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첫째, 메이플라워호가 신대륙의 이미지인 ‘자유’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영국은 1530년대 헨리 8세의 이혼이 교황청에 의해 거부당하자 로마가톨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성공회를 만들어 국교로 삼았다. ‘청교도’라고 불리는 일부 영국의 신교도들은 가톨릭만이 아니라 성공회에도 반대해 자신들의 종교의 자유를 찾아 네덜란드로 탈출했다. 이들 중 일부 순례자들은 신대륙으로 향했다. 메이플라워호는 이처럼 유럽과 대조적인 ‘종교의 자유’를 상징하기 때문에 주목을 받았다.

둘째, 자유와 관련된 메이플라워호의 또 다른 특징이 있다. 102명의 순례자는 신대륙에 도착하자 중요한 결정을 했다. 하선하기 전에 앞으로의 정착 생활과 관련해 각자가 지켜야 할 규칙과 규율 그리고 이를 관장할 기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이를 서면으로 작성한 ‘메이플라워 협약’을 만들어 서명한 것이다. 유럽의 왕정과 다른 ‘자치’, ‘민주적 통치’의 초기 형태를 실천한 것이다.
첫 겨울에 추위와 굶주림으로 절반 사망
“하느님 고맙습니다!” 육지에 도착하자 이들은 땅에 입을 맞추고 하느님에게 기도했다. 이들은 원래 6월에 2척의 배로 네덜란드를 떠나 9월 초에 신대륙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여러 문제로 출발이 늦어져 9월 15일에야, 그것도 메이플라워호만이 출항할 수 있었다. 원래 계획과 달리 길이 27m인 170t밖에 안 되는 좁은 배 1척에 빽빽하게 탄 이들은 폭풍을 만나 죽을 고비를 여러 번 거치고 근 70일 만에 드디어 신대륙에 도착했으니, 얼마나 감격했겠는가?
순례자 기념공원에는 철책으로 보호해 놓은 기념물이 있다. 평범한 돌이었다. 자세히 보니, 돌에는 무언가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1620.’ 순례자들이 자신들이 첫발을 내디딘 역사적인 돌로, 자신들이 도착한 연도를 새겨놓은 것이다.
‘존 앨러튼, 메리 앨러튼, 리처드 비터리지, 로버트 카터, 존 카버와 부인 캐서린….’ 언덕 위로 올라가자 여러 이름이 쓰여 있는 커다란 비석이 나타났다. 모두 49명이나 된다. 이들은 모두 신대륙 도착 첫 겨울에 목숨을 잃은 사람들이다. 이들은 항해가 늦어지는 바람에 너무 늦은 절기에 신대륙에 도착함으로써 농작물을 심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이 지역의 추위를 견딜 준비가 돼 있지 않았다. 그 결과, 순례자들의 절반이 추위와 굶주림으로 목숨을 잃었다.
이 순례자 집단추모 비석 뒤에는 커다란 원주민 전신상이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다. 가까이 가서 보자 동상 밑 바위에 ‘순례자의 수호자, 왐파노아그(Wampanoag) 부족 대추장 마사소이트(Massasoit)’라고 쓰여 있었다. 1921년에 세워진 것이니, 필그림 300주년 기념으로 세운 것이다. 동상에 쓰여 있듯이, 그는 진정한 ‘순례자들의 수호자’였다. 그가 없었다면 순례자들은 결코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원주민들은 자신들과 피부색부터 모든 것이 다른 이방인들을 자신들의 영토를 침입한 침략자로 간주해 공격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방인들을 ‘반가운 손님’으로 반기며 이들이 살아남을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도와줬다. 이들은 순례자들에게 야생에서 먹을 식량을 구하는 방법을 가르쳐주며 겨울을 나게 해줬다. 봄이 되자 이들은 이 지역에 적합한 옥수수 작물 재배법 등 다양한 생존법을 알려줬다. 이들 덕분에 순례자들은 살아남을 수 있었다.

만일 거꾸로 원주민들이 영구 이주를 위해 집단적으로 영국으로 항해해 갔다면, 영국인들도 이들을 그처럼 대했을까? 턱도 없는 이야기다. 죽이거나 감옥에 처넣었을 것이다. 우리도 비슷한 시기 영구이주가 아니라 폭풍을 만나 표류해온 하멜 일행을 압송해 신문하고 오랫동안 강제억류했다.
“이처럼 저희에게 먹을 소중한 식량을 주신 전능하신 하느님, 그리고 오늘 이 자리에 같이한 왐파노아그 친구들, 감사합니다.” 1621년 11월, 53명의 순례자는 마사소이트 추장 등 90명의 왐파노아그족을 초대해 수확한 곡식과 과일, 사냥한 야생사슴을 요리해 추수를 감사하는 축제를 열었다. 미 대륙 최초의 추수감사절이다. 2년 뒤 매사추세츠주는 추수감사절을 공식 명절로 선포했고, 이는 다른 지역으로 퍼져 나갔다.

자신들의 정착 도와준 원주민 집단학살
‘이 순례자들의 모험은 역사상 그 어느 것보다 숭고한 종교의 자유를 위한 모험이었다.’ 도착 첫해 목숨을 잃은 순례자들의 이름이 쓰인 추모 비석 반대쪽에 쓰여 있는 글이다. 맞다. 자신의 믿음을 지키기 위해, 종교의 자유를 위해, 고향을 떠나 목숨을 걸고 5000㎞ 이상 떨어진 미지의 신대륙을 찾아 떠난 순례자들의 모험에 대해 우리는 존경심을 표하지 않을 수 없다.

문제는 이처럼 숭고한 순례와 이민은 어떻게 이후 자신들을 그토록 환대했고, 살아남을 수 있도록 도와준 원주민들의 집단학살로 귀결됐느냐는 것이다. 그뿐이 아니다. 종교의 자유를 향한 순례가 어떻게 해서 원주민 어린이들을 부모로부터 빼앗아 기독교 기숙학교에 강제입학시키고, 기독교로 개종하도록 강제하는 ‘종교독재’로 변질했느냐는 것이다. 한마디로, 은혜를 원수로 갚은 것이다.
나는 묵묵히 플리머스의 앞바다와 그곳에 정박한 메이플라워호를 내려다보고 있는 마사소이트의 동상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추장님, 당신이 그토록 도와준 순례자의 후손들이 당신의 후손에게 저지른 학살과 만행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만일 이들의 후손이 그 같은 만행을 저지를 줄 알았어도, 당신은 순례자를 도와줬을 것입니까?”
<손호철 서강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