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슈퍼컴퓨터'. 이름만 들어도 뭔가 범상치 않다. 상상을 초월하는 속도로 수많은 계산을 처리하는 이 거대한 기계는 단순히 빠른 컴퓨터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슈퍼컴퓨터는 이제 우주의 기원을 파헤치는 일부터 복잡한 자연현상의 예측과 기후분석, 국방과 보안, 각종 공학 시뮬레이션이나 신약의 개발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용되고 있다. 농업 분야도 슈퍼컴퓨터를 도입해 활용하기 시작했다.
농촌진흥청은 2023년 농생명슈퍼컴퓨팅센터를 설치하고 이곳에서 초고성능컴퓨터인 NABIS 2호기를 운영 중이다. 원래는 기상청에서 기상 예보 및 기후 예측에 사용되던 슈퍼컴퓨터였으나 지금은 농업연구 전용의 분석 허브로 이용한다. 이 컴퓨터는 초당 2900조회 연산할 수 있다. 이는 일반 컴퓨터 수천 대가 동시에 작업해야 가능한 수준으로 우리나라 사람들 모두가 동일한 계산을 수행한다 해도 1000년 넘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럼 이 강력한 연산 능력은 어디에 쓰일까. 과거 농업은 토양, 기후, 품종을 오랜 경험으로 판단하는 '감'의 영역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유전체 정보와 생육 데이터를 바탕으로 인공지능(AI)이 작물의 품질을 예측하고 새로운 품종을 설계하는 '디지털 육종'의 시대가 열렸기 때문이다.
이에 속도를 붙인 것이 바로 슈퍼컴퓨터다. 예를 들어 고추 849개 품종의 유전정보를 기존 서버로 분석하려면 27개월이 넘게 걸린다. 그러나 NABIS 2호기를 활용하면 이를 단 2주로 줄일 수 있다. 벼, 콩, 배추 같은 주요 작물도 마찬가지다. 시간이 수십 분의 1로 단축되면서 육종 속도도 획기적으로 빨라졌다.
미국에서는 이미 농업 전용 슈퍼컴퓨터가 널리 활용되고 있다. 미 농무부는 '세레스(Ceres)', 아틀라스(Atlas)'라는 두 대의 슈퍼컴퓨터로 병해충 모델링, 기후변화에 따른 작황 예측, 작물 유전자 분석을 동시에 수행하고 있다. 일본도 농업·식품산업기술종합연구기구(NARO)를 중심으로 고성능 연산을 통한 병해충 탐지와 작황 시뮬레이션을 실현하고 있다. 이러한 사례는 농업이 데이터 중심의 정밀과학으로 옮겨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도 이에 뒤처지지 않는다. NABIS 2호기는 농촌진흥청이 주도하는 농생명 데이터 허브이자 분석 플랫폼이다. 전국의 연구기관, 종자 기업, 대학들과 연계한 공동 연구의 핵심이기도 하다. 농촌진흥청은 조만간 벼, 오이, 토마토 등 16작물 1만여 자원의 유전변이 정보를 NABIS 2호기로 분석을 완료하고 공개를 준비 중이다. 이는 민간에서는 5년이상 걸리는 일로 단독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작업이나 농진청 슈퍼컴으로는 2개월 만에 완료했다.
NABIS 2호기의 역량은 농업뿐만 아니라 생명과학, 의약학 분야에도 미치고 있다. 전북지역 의과대학, 약학대학과 협력해 장비 활용을 넘어서 농업과 보건의 융합 생태계를 만들어가는 중이다.
슈퍼컴퓨터는 다른 세계 이야기가 아니다. 물론 그 쓰임이 연구기관이나 세계적인 기업에 한정된 것도 아니다. 우리가 먹는 밥 한 그릇, 농업인이 키우는 작물 한 포기, 유전병을 막는 신약 등 그 모든 기반에 필요한 데이터를 분석하고 그 속도를 앞당겨주는 촉매제다.
NABIS 2호기로 우리는 더 빠르고 더 정밀하게 농업의 미래를 설계해 나갈 수 있게 됐다. '강한 농업, 스마트한 연구'라는 미래는 더는 추상적인 목표가 아니다. 지금 슈퍼컴퓨터가 정밀농업의 판을 바꾸며 그 기반을 다져나가고 있다.
김남정 농촌진흥청 농업생명자원부장 vastnj@korea.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