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런 사람들은 인종차별주의자예요. 나를 그렇게 봐요. 야생마, 야생 원숭이, 그렇게 엉터리로요.
성공한 예술가였지만, 세상의 시선은 차가웠다. 1986년 전성기의 바스키아(1960~88)는 두 살 아래 친구 탐라 데이비스의 카메라 앞에서 그런 속내를 털어놓았다. 이 장면은 20년도 더 지나서야 세상에 공개됐다. ‘장 미셸 바스키아: 빛나는 아이’(2010)다.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열리는 ‘장 미셸 바스키아: 과거와 미래를 잇는 상징적 기호들’ 전시장에서 이 다큐멘터리의 20분 축약본이 상영 중이다. 전편은 티빙에서 볼 수 있다. 일요일인 9일 오전에도 많은 관객이 화면 앞에 서 있었다. 전시 개막 50일째인 11일까지 입장권은 10만장 이상 판매됐고, 주말에는 하루 평균 1500명이 전시장을 찾는다.

9일 전시장에는 다큐 ‘빛나는 아이’의 감독 탐라 데이비스(63)도 있었다.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영화학도 데이비스는 스물한 살이던 1983년 바스키아를 처음 만났다. 그는 LA 거고지언 갤러리에 개인전을 하러 온 바스키아를 태우러 공항에 나간 아르바이트생이었다. “짐 찾는 곳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트렁크 하나 없이 갈색 종이백 하나 들고 있더라. 어딘가 예술가 같은 카리스마가 있어서 한눈에 알아봤다”고 말했다. 늘 카메라를 가지고 다니던 데이비스에게 바스키아가 먼저 “난 아주 유명한 사람이 될 거니까, 자 찍어”라고 말했고, 데이비스는 “나도 유명한 감독이 될 거야”라고 응수했다. “성공한 흑인 예술가만큼이나 유명한 여성 감독도 생각하기 어렵던 시절이라 이런 대화가 가능했던 것”이라고 그는 돌아봤다.

1980년대 찍은 영상을 2010년에야 비로소 영화화했다. 왜 이렇게 늦었나.
“바스키아를 마지막으로 본 건 1988년 여름, 죽기 2주 전이었다. 만년의 바스키아는 쓸쓸했다. 친구들이 자신을 이용한다 여겨 스스로를 고립시켰다. 친구가 그렇게 세상을 떠나니 그 우정에 오해가 생길까 봐 영상을 공개할 엄두를 못 냈다.”
2006년 데이비스는 인터뷰 영상을 단편 ‘바스키아와의 대화’로 편집해 선댄스 영화제와 LA 현대미술관(MOCA)에서 상영했다. 2010년 더 긴 다큐멘터리로 제작한 게 ‘빛나는 아이’다.
다큐를 만들 때 가장 어려웠던 점은.
“저작권자였던 바스키아 아버지 제라르의 허락이었다. (2013년 세상을 떴다) 만나기도 어려웠지만, 설득하기는 더 어려웠다. 성공한 사업가였던 제라르는 아들의 이미지를 보호하고 싶어했다. 매우 방어적이었다. 바스키아가 얼마나 위대한 예술가였는지 보여주려는 거지 그를 이용하려는 게 아니라고 설득했다.”

데이비스 감독은 뉴 키즈 온 더 블록, 비스티 보이즈, 소닉 유스를 비롯한 뮤직비디오를 150편 이상 연출했다. 이런 경력 덕분인지 ‘빛나는 아이’에는 바스키아의 소년미가 담뿍 담겼다. 그가 가장 좋아했던 비밥(1940년대 미국에서 발달한 템포 빠른 재즈)이 빠르게 흘렀다. 이전에도 바스키아 영화는 더러 있었다. 1981년 바스키아가 직접 출연한 독립영화 ‘다운타운 81’(감독 에도 베르톨리오)은 뉴욕의 무명 예술가 바스키아의 하루를 담았다. 2000년 칸 영화제에서 상영됐다. 함께 활동했던 화가 줄리언 슈나벨이 연출한 ‘바스키아’도 있다. 가수 데이비드 보위가 앤디 워홀을, 배우 제프리 라이트가 바스키아를 연기했다.
이미 바스키아 영화들이 좀 있었는데, 새로 영화를 만들었다.
“‘다운타운 81’은 스물한 살 바스키아를 너무도 아름답게 담았다. 하지만 저예산 예술영화였기에 사운드 등에서 아쉬운 점이 있다. 슈나벨의 ‘바스키아’에서 제프리의 연기는 좋았다. 그에게 내 촬영분을 미리 보여줘 바스키아의 걸음걸이, 말투를 익히게 했다. 그렇지만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 불편했다. 내가 알던 바스키아가 아니었다. 영화에서 바스키아는 줄곧 마약중독자로만 비춰졌다. 바스키아 아버지를 설득하기 어려워던 이유 중 하나도 그거였다. 바스키아는 3700점 넘는 작품을 남겼는데, 마약만 해서는 그렇게 집중해서 작업할 수 없었을 거다. 내가 아는 바스키아의 모습을 담고 싶었다.”
영화로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인간 바스키아’다. 사람들은 그를 잘 모른다. 아름다운, 빛나는 아이였다. 지적이고, 말 잘하고, 재치있고, 따뜻한 사람이었다.”
당신에게 바스키아는.
”수수께끼(Enigma)다. 너무 일찍 왔고,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줬고, 죽고 나서 더욱 큰 이름이 됐다는 점에서 예수도 연상된다. 세상이 자기를 알아주지 않는다 여기며 쓸쓸히 세상을 떠났다. 그게 참 안타깝다. 생전에 휘트니 미술관도 뉴욕 현대미술관(MoMA)도 작품을 기증하겠다는 제안을 거절했다. 바스키아는 자기가 이렇게 전 세계적으로 유명해질 줄 알았을까? 이 전시를 그가 봤다면 정말 행복해했을 것 같다.”
그는 “많은 분들, 특히 여성분들이 카메라에 기록을 남겼으면 한다. 미국서 나오는 영화의 90%가 남성 감독이 만든 것”이라며 “인간을 바라보는 여성들의 관점이 세상에 더 많아지면 좋겠다”고 말했다. 데이비스는 지난해 세븐틴을 비롯한 보이밴드에 대한 다큐 ‘라저 댄 라이프(Lager than life)’도 연출했다. 그는 “소년 소녀들에게 첫사랑의 느낌을 주기에 K팝 아이돌과 그 팬덤은 아름답다"고 말했다. 한국에 처음 왔다는 그는 “어제 한국에 도착했는데 이미 올리브영에 다녀왔다”며 “온지음에서 한국 음식 강좌를 들을 거고, 두피와 피부 관리도 예약해뒀다”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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