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함께 은행나무길을 걷던 엄마가 말했다. 은행잎이 활짝 피어났네. 엄마에게 노랑은 지는 색이 아니라 피는 색, 환히 피어나는 색이었다. 나무 아래 떨어진 은행을 요리조리 피해 가며 걷다가, 요즘엔 은행 주우러 다니는 여자들을 보기 힘들지 않냐 내가 물었다. 그럴 만한 사람은 다 갔나 봐, 저세상으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도토리 주우러 다니는 사람도 그렇게 많았는데, 안 보여. 요즘 사람들이 그걸 어떻게 알아. 그 냄새 나는 은행알 주워다 씻고 말리고, 도토리 껍질 벗겨 빻아 울리고 가라앉히고 말리고. 사 먹으면 그만이지. 그 말에 조금 쓸쓸해졌다.
엄마가 아프면 죽 끓여 먹는 잣
따기 어렵고 힘들게 열매 맺어
기후변화 덮쳐 수확도 감소세
귀해서 더 고소한 엄마 드릴 잣죽

엄마가 은행이나 도토리를 주우러 다닌 적은 없지만, 잣나무를 지날 때면 어디 잣송이 떨어진 것 없나 걸음을 멈추고 살펴본다. 텅 빈 잣송이를 들었다 놓을 때는, 요것들이 잣 까먹는데 선수라며 청설모에게 토라지기도 하고, 어쩌다 반쯤 찬 잣송이를 발견하면 어린애처럼 좋아한다. 물고 가다 떨어뜨렸나, 이따 가져가야지 숨겨두었나, 요걸 못 찾고 남겨두었나, 내가 가져다 먹는다, 용용 죽겠지. 딱 이런 느낌으로.
엄마에게 잣죽은 아플 때나 겨우 먹어볼 수 있는 귀한 음식이었다. 어릴 적 소화력이 약했던 엄마는 자주 아무것도 못 넘기고 누워 있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할머니는 잣죽을 끓여주었다고 한다. 그때나 지금이나 귀하디귀한 잣을, 몇 알 넣어 향만 풍기는 게 아니라 잔뜩 넣어서, 절구에 갈고 면 보자기에 걸러내기까지 해서 곱게 끓여낸 잣죽. 얼마나 부드럽고 달고 맛있던지, 어디 좀 아프고 싶을 정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잣죽이 싫었다. 잣죽을 끓이는 날은 엄마가 아픈 날. 엄마로서는 그거라도 먹고 힘을 내겠다는 회복의 의지였겠지만, 어린애로서는 아픈 엄마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을 자극하는 냄새일 뿐. 지금은 아플 때가 아니어도 그저 맛있어 쑤어 먹기도 하지만, 엄마에게 잣죽은 여전히 회복을 위한 특식이다. 두유 제조기에 휙 돌려 매일 드시라 했더니, 아프지도 않은데 그래서야 쓰겄냐 고개를 젓는다. 괜히 오기가 생겨 그깟 잣 얼마나 한다고 내가 얼마든지 사 주마 큰소리를 쳤더니, 귀한 건 귀한 대로 귀하게 대해야지 꾸짖는다.
그깟 잣이라니. 잣나무는 보통 20~30m까지 자란다. 열매는 잣나무 꼭대기 가지 사이에 열리는데, 그걸 따려면 사람이 직접 나무를 타고 올라가야 한다. 위험을 감수해야 얻을 수 있는 열매라는 뜻. 잘 익은 밤송이처럼 툭 벌어져 밤알을 내놓는 것도 아니고, 비늘 모양의 잣 송아리 껍질에 파묻혀 있어 탈곡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렇게 나온 잣은 딱딱한 껍질에 둘러싸여 있어 피잣. 피잣의 딱딱한 껍데기를 깨고 나면 또 한 겹의 얇은 껍질에 둘러싸인 알맹이가 나오는데 이를 황잣, 그 껍질까지 벗겨내 뽀얀 속살이 드러난 잣을 백잣이라 한다. 죽은 백잣으로 끓인다. 그 뽀얀 것을 손에 쥐기까지의 노고를 생각한다면. 진정 그깟이라 함부로 말할 수 있겠는가.
잣나무는 왜 그리 높은 곳에 딱딱한 껍질로 감싼 열매를 맺나. 더 멀리 퍼뜨리기 위한 열매의 생존 전략. 아무래도 행동반경이 좁은 작은 설치류보다는, 더 멀리 날아갈 잣까마귀와 딱딱한 껍질을 까먹을 만한 몸집의 청설모가 더 유리할 테니까. 더불어 더 건강한 열매를 맺기 위한 전략도 세웠다. 나이가 적어도 스무 살이 되어야 열매를 맺기 시작하고, 3~4년을 주기로 해거리(한 해를 거름)까지 한다. 매해 열리는 것도 아니다. 봄에 수분(受粉)을 해서 잣 방울이 맺히면 그 이듬해 가을이 되어서야 붉은 갈색을 띠며 알이 여문다. 수분에서 열매가 맺히고 잣이 여물기까지 적어도 16개월, 거기에 해거리까지. 진정 귀하게 여길 수밖에 없는 전략이다.
큰소리도 쳤겠다 마침 수확철이겠다, 햇 잣 맛이나 볼까 살펴보니 가격이 만만치가 않다. 주산지로 유명한 가평의 잣 수확량은 2013년 이후 지금까지 계속 감소 추세다. 폭염 폭우 해충의 공격. 그중에서도 기후변화로 인해 급증한 소나무허리노린재의 피해가 가장 크다. 소나무허리노린재는 외래 침입종으로, 솔방울은 물론 잣 방울의 즙을 빨아 먹고 자란다. 씨앗을 시들게 하고 제대로 크지도 못하게 만드는 소나뭇과의 해로운 적.
그리하여 그 옛날 아프고 나야 겨우 얻어먹던 시절보다 더 몸값이 올라버린 잣이지만, 노쇠한 엄마를 위해서라면, 100g이나 200g도 아니고 통 크게 1㎏을 주문하면서, 이 정도면 죽을 얼마나 쑤려나 가늠해 보다가, 입안에 슬며시 고소한 잣 향기가 환히 피어나며 절로 노래하게 되는 것이다.
다디달고 다디단 햇잣죽. 곱디곱고 곱디고운 햇잣죽. 꼬숩고 다디단 햇잣죽.
천운영 소설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