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벌 공화국'에서 혁신은 자랄 수 없다

2025-11-11

한국의 기업법 체계는 거미줄처럼 얽힌 규제의 그물이다. 경제 관련 법률 가운데 징역이나 벌금 등 형사처벌이 가능한 조항만 8403개에 이른다. 그중 3분의 1은 중복 제재가 가능해 단 한 번의 실수로 과징금·징역·손해배상을 동시에 받을 수 있다. 규제가 아니라 사실상 기업을 잠재적 범죄자로 취급하는 법 구조다.

OECD 주요 국가는 담합, 소비자 위해 등 고의성이 명확한 위반에만 형사처벌을 적용한다. 그러나 한국은 보고 누락, 행정 절차 미이행 같은 단순 착오까지 형벌의 대상에 포함시킨다. 법이 사회 질서를 세우는 도구가 아니라 기업 활동을 옭아매는 족쇄로 작동하는 셈이다. 결과는 뻔하다. 법을 지키려는 노력보다 법을 피하려는 방어가 경영의 중심에 자리 잡는다.

과잉 처벌의 단면은 화장품법만 봐도 드러난다. 판매자가 직접 라벨을 훼손하지 않았더라도 훼손된 제품을 진열했다는 이유만으로 3년 이하 징역 또는 3000만원 이하 벌금형에 처해질 수 있다. 포장 훼손이 배송 과정에서 발생했는지 소비자 반품 중에 생겼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현장에서는 "라벨 찢김 하나에도 형사 고발 가능성부터 검토해야 한다"는 말이 나온다. 혁신과 창의가 아니라 '리스크 관리'가 기업의 일상 언어가 된 이유다.

문제는 이 과잉 처벌이 결국 소비자 피해로 이어진다는 점이다. 기업이 불확실한 법 리스크에 대비하기 위해 인증·법무·컨설팅 비용을 늘리면 그 비용은 제품 가격에 고스란히 반영된다. 국민 보호를 내세운 규제가 오히려 국민의 부담을 키우는 역설이 벌어지고 있다.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빠른 산업화를 이룬 나라다. 그러나 지금의 법 체계는 그 성장의 발목을 잡고 있다. 법이 예측 가능하게 작동하지 않으면 기업은 신제품 개발보다 규제 대응에 투자보다 리스크 관리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 이런 환경에서 혁신이 살아남을 리 없다.

정부가 추진 중인 '경제 형벌 합리화' 논의가 선언에 그쳐서는 안 된다. 행정 착오와 고의적 위반을 구분하지 못하는 제도 아래에서는 아무리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외쳐도 공허하다. 과잉 처벌이 법치가 아니라 공포를 낳는다면 그 체계는 이미 법의 본래 목적에서 벗어난 것이다.

이제는 처벌의 공포가 아니라 예측 가능한 법 질서가 필요하다. 기업이 합리적으로 책임을 지되 한 번의 실수로 기회가 막혀선 안 된다. 법은 위반자를 옭아매는 칼이 아니라 기업이 더 멀리 나아갈 수 있도록 길을 비추는 나침반이어야 한다. 그것이 '처벌 공화국'을 '혁신 국가'로 바꾸는 첫걸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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