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에 살 때, 지진보다 무서웠던 게 ‘지진 알람’이다. 삐익삐익~ 신경 긁는 소리와 함께 “지신데스(지진입니다)” AI 스타일 경고음이 들려오면 벌떡 일어나 안절부절, 다가올 흔들림을 기다렸다. 지진이 나면 기사를 쓰는 것이 특파원의 업무, 재빨리 식탁 아래 노트북 펼치고 NHK 속보를 받아 적는 게 나름의 진정 의식이었다.
누구도 어찌할 수 없는 재난 앞에서 사람들은 ‘타인’을 함께 보호받아야 할 ‘우리’로 받아들이는 데 인색해진다. 친절하지만 웬만해선 자신이 세운 벽 안으로 다른 이를 들이지 않는 일본인의 성정은 반복되는 지진 때문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다. 영화 ‘해피엔드(사진)’의 배경도 대지진 공포 속 수시로 알람이 울리는 상황. 정부와 학교는 안전을 이유로 감시 시스템을 만들고, 이방인을 솎아내기 시작한다. 주인공인 고3 학생 일본인 유타(구리하라 하야토)와 재일한국인 4세 코우(히다카 유키토)는 인생의 대부분을 함께 보낸 절친이지만, 혼란 속에서 전혀 다른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그리고 영화 카피처럼, ‘세상이 흔들리던 날, 우정이 기울어졌다.’
영화를 만든 소라 네오(空音央·34) 감독은 2023년 별세한 음악가 사카모토 류이치(坂本龍一)의 아들. 일본 사회 뿌리 깊은 차별 문제를 이렇게 감각적으로 그릴 수 있다니! 감탄하게 된다. 한편으로 영화는 성장에 관한 이야기다. 한 몸 같던 두 사람이 서로의 ‘다름’을 받아들이며 분리의 고통을 통과하는 과정. 누구나 그런 경험이 있기에, 두 소년이 육교 위에서 헤어지는 마지막 신에 마음이 내려앉는다. 나와 함께 육교에 섰던 모든 친구들, 그들의 ‘해피엔드’를 기원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