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은 점·면 아닌 '공간'…"종묘 경관도 미래 투자로 접근을" [조상인의 미담]

2025-11-14

장엄한 침묵의 공간이던 종묘가 연일 시끄럽다. 서울시가 최근 종묘 맞은편 재개발 사업지인 ‘세운4구역’의 건물 높이를 30층 빌딩까지 가능한 최고 145m로 변경하면서 보존과 개발의 갈등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이른바 ‘왕릉뷰’ 아파트를 방불케 하는 ‘종묘뷰’ 논란과 문화유산으로부터 100m 이상 벗어난 곳에서의 개발은 문제되지 않는다는 서울시의 입장이 팽팽하게 맞붙었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는 1395년 한양으로 수도를 옮기고 그해 말 종묘부터 마련했다. 창덕궁과 창경궁 남쪽에 인접한 종묘는 조선의 역대 국왕들과 왕후의 신위를 모신 사당이다. 사극에서 신하들이 임금에게 “종묘사직을 돌보소서”라며 읍소하는 장면에서 알 수 있듯 왕실과 나라 그 자체를 상징하는 것이 종묘다.

종묘는 정신적 뿌리다. 어느 문화권이든 종교와 왕실을 초월해 신(神)과 망자를 모시는 건물을 둔다. 그리스 아테네 아크로폴리스의 파르테논신전은 문명의 상징이자 도시의 정체성이며 민주주의의 가치 그 자체다. 인도 타지마할은 무굴제국의 황제가 왕비를 위해 세운 대리석 무덤이지만 인도를 대표하는 이미지가 됐다. 중국은 명·청 황릉과 함께 국가 의례 공간인 천단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보유했고 일본은 천황 가문의 이세신궁을 귀하게 여기고 있다. 영국 웨스트민스터사원에서는 천 년 이상 국왕의 대관식이 거행되고 있다.

종묘는 좀 더 특별하다. 가장 강력한 위엄을 가지지만 가장 소박한 형태를 취했다. 종묘의 중심 건물인 정전(正殿)은 여타 궁궐 건축물의 화려함과 달리 단청이 없다. 지붕은 가장 단순한 맞배지붕이다. 서쪽부터 한 방씩 19분의 왕과 왕비를 모신 19칸 구조라 좌우로 101m, 우리나라 단일 건물로는 가장 긴 건물이다. 48개의 붉은 기둥들이 열주(列柱)를 이루는데 반복되는 기둥의 리듬감이 영원히 이어질 것만 같은 장관을 그려낸다. 건축 연구자 구본준은 저서 ‘세상에서 가장 큰 집’에서 이집트 핫셉수트신전, 그리스 파르테논신전 등 서양 건축물은 수직의 기둥이 높이로 디자인 효과를 발휘하지만 동양에서는 수평으로 반복된 기둥들의 길이 효과가 탁월하다며 “종묘의 디자인은 단순함의 힘 덕분에 ‘우주를 담아낸 듯한 느낌’이 극대화된다”고 했다.

스페인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으로 유명한 전위와 파격의 건축가 프랭크 게리는 1994년 처음 한국을 방문했을 때 서양의 건축 기준으로는 설명이 안되는 종묘의 위엄에 놀랐고 “종묘는 세계 최고의 건물 중 하나이며 한국인들은 이 건물의 존재에 감사해야 한다”고 했다. 2012년 다시 방한했을 때 또다시 종묘를 찾은 그는 종묘가 지닌 고요함의 미덕을 강조하며 “이곳은 성스러운 장소이다. 이 안에서 도시가 보여서는 안 된다”라고 힘주어 말했다. 문화재청장을 지낸 유홍준 국립중앙박물관장은 저서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의 서울편을 종묘로 시작했다. 정전의 월대 위에서 펼쳐지는 종묘제례의 광경을 한 점 수묵화처럼 묘사한 그는 한국미의 정수라 할 수 있는 검소하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되 사치스럽지 않은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를 종묘에서 확인할 수 있다고 했다.

종묘의 정전과 영녕전, 종묘 의례인 종묘제례와 종묘제례악은 국보와 국가무형유산으로 지정됐다. 1995년 석굴암과 불국사, 해인사 장경판전과 함께 종묘는 한국의 첫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됐다. 유네스코는 세계유산 주변에 개발 사업이 진행될 경우 전문가의 사전 심의를 통해 유산의 ‘탁월한 보편적 가치(OUV)’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평가를 받으라고 권고하고 있다. 이미 4월에 유네스코는 세운4구역 재개발 계획에 우려를 표하며 ‘유산영향평가’를 실시하라는 요청을 서울시에 보냈지만 서울시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세계유산으로서 종묘의 위상이 위험해질 수도 있다는 뜻이다. 영국 런던시가 2006년 세계유산인 런던 타워 인근에 초고층 건물 신축 계획을 발표하자 유네스코는 런던 타워를 ‘위험에 처한 세계유산’으로 지정하고자 했다. 결국 신축 계획은 철회됐다. 김지현 유네스코한국위원회 의제정책센터 팀장의 2021년 영문 저서 ‘문화유산 보호에서의 비국가 행위자(Non-State Actors in the Protection of Cultural Heritage)’에서는 개발 압력에 놓인 세계유산 보호 문제에 대해 간과할 수 없는 사례들을 소개하고 있다. 독일 드레스덴의 엘베계곡은 2004년 세계유산으로 등재됐으나 지방정부가 계곡 내 도로와 대형 교량 건설 등 개발 추진 정책을 내세워 심각한 가치 훼손 위기에 처했다. 유네스코 자문기구(ICOMOS)의 반대에도 현지 정치권과 법원이 주민의 개발 선택을 받아들였고 결국 2009년 드레스덴 엘베계곡의 세계유산 등재가 취소됐다. 1982년 등재된 호주 태즈메이니아 아생지대 세계유산 사례도 의미심장하다. 댐 건설이 계획됐으나 호주 고등법원이 “국가는 세계유산 보호에 대한 국제적 의무가 있으며 개발이 그 의무를 침해할 수 없다”며 국제 협약인 세계유산협약의 우선권을 인정했다. 말레이시아 조지타운, 터키 이스탄불 역사지구도 무분별한 개발에 국제기구가 개입해 조정 또는 철회를 이끌어낸 바 있다.

문화유산은 점(點)도, 면(面)도 아닌 공간으로서 존재한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관리의 핵심 원칙인 탁월한 보편적 가치는 건물 자체뿐만 아니라 주변 경관, 시야권과 맥락 전체에서 빛을 발한다. 도시 전체의 아름다움으로 브랜드를 구축할 수 있는 ‘철학’ 있는 도시 개발 정책이 필요하다. 위기까지 몰렸던 말레이시아 조지타운은 고층 건물 개발 대신 원도심 보존을 택해 ‘역사 도시’의 브랜드를 만들어 지역 관광 산업의 성장 동력을 확보했다. 종묘와 같은 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영국 에든버러의 구시가지를 보존하기 위해 시 정부는 개발로 인한 도시 스카이라인이 탑·성곽·언덕의 조망축을 가리지 않도록 엄격히 통제했고 스코틀랜드 계획법에 따라 세계유산의 경관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고층 개발에 중앙정부도 개입할 수 있게 했다. 2016년에 발간된 현지 기관의 연구 보고서에 따르면 에든버러 세계유산지구의 경제 가치는 약 12억~14억 파운드, 우리 돈으로 2조 원 이상으로 추산됐다. 마치 우리의 경주처럼 벨기에 브뤼주는 중세 도시 전체가 박물관처럼 사람들을 끌어들여 연간 800만 명 이상의 관광객을 유치한다. 역사지구를 품은 오스트리아 빈, 유럽 의회가 위치한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등도 초고층 개발 정책을 버리고 문화 도시의 이미지를 견고히 했다. 일본 교토는 세계적 문화유산 도시 이미지를 통해 해외 명품 브랜드 입점, 국제 행사 유치에서 유리한 환경을 확보했다.

문화유산을 지키는 일은 과거의 보존이 아니라 미래를 위한 전략이자 투자이다.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주인공들이 누비던 북촌·한양성곽 등에서 확인할 수 있듯 잘 지켜낸 문화유산은 도시 브랜딩과 관광 효과를 가져오고 국제적 위상과 국민적 자긍심까지 드높인다.

종묘는 도심 한복판에 있지만 마치 도시에서 잠시 벗어난 듯한 단절의 평온함, 쉼의 미학, 고요함의 가치를 가진다. 더 이상 개발주도형 고층 건물, 마천루가 그리는 화려한 스카이라인이 도시의 경쟁력이 되지 않는다. 백제 이래로 천 년 수도의 역사를 지닌 서울이라면 더욱 다른 도시 전략이 필요하다. 문화유산을 통해 지켜낸 경관이 경쟁력이 되고 경제 효과를 끌어낼 힘이 된다. 종묘의 나지막한 미덕을 모르는 후손들이 마냥 높고 으리으리한 건물만 지으려 하니 안타깝기 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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