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우 방역선’이 무너졌다···‘기업 환경규제 대폭 완화’ 통과시킨 유럽의회

2025-11-14

유럽의회가 13일(현지시간) ‘기업 규제’를 완화하는 법안을 가결했습니다. 유럽연합(EU)는 전통적으로 친환경 기조였던 만큼 이번 법안 통과를 두고 ‘의외’ ‘충격’ 등 반응이 나오고 있는데요.

어쩌다 이런 일이 벌어진 걸까요? 오늘 ‘뉴스 깊이보기’에서는 구체적인 법안 내용과 개정안의 입안·통과 과정을 짚어보겠습니다.

무슨 일이야?

유럽의회가 이날 통과시킨 법안은 ‘기업 지속가능성 보고 지침’(CSRD)과 ‘기업의 지속 가능한 공급망 실사 지침’(CSDDD) 법안의 개정안입니다.

CSDDD 등은 ①기업에 노동·환경과 관련한 정기적인 보고서 발행을 의무화하고 ②전세계 공급망에서 발생할 수 있는 강제노동, 삼림벌채 등 인권·환경 문제 방지 및 해결 책임을 부과하는 내용으로, 지난해 4월 유럽의회에서 통과됐어요.

직원 1000명 이상, 매출액 4억5000만 유로(약 7700억원) 이상 기업이 적용 대상이었습니다. 의무 위반시에는 전세계 연매출액 5% 이상 과징금이 부과되도록 해 기업 부담을 늘렸고요. 기업에 기후 변화 완화를 위한 경영 전환 계획 수립을 강제하는 이른바 ‘녹색 전환 계획’ 조항도 포함했습니다.

하지만 이날 표결로 변화가 생겼습니다. 적용 대상 기업 기준을 직원 5000명 이상, 15억 유로 이상 대기업으로 확 높인 것입니다. 그만큼 적용 대상 기업 숫자는 대폭 줄어들게 됐어요. 녹색 전환 계획 조항도 삭제됐고요. 올 연말까지 유럽의회와 EU 회원국 간 협상 과정을 거치면 이 개정안이 확정됩니다.

개정안은 찬성 382표, 반대 249표, 기권 13표로 통과됐습니다.

법안을 발의한 것은 유럽 의회 내 최대 정파인 중도 우파 성향 유럽국민당(EPP)이에요. 이 당 안에는 친기업 우파 성향 의원이 다수 포진해 있지만, 기존에는 친EU·친민주라는 공통 분모 하에 중도좌파 사회민주진보동맹(S&D), 중도 자유당그룹(Renew Europe)과 사실상 입법연대를 유지해 왔습니다. 반대로 극우와 선을 넘어 손잡지는 말자는 불문율도 있었어요. 이를 ‘방역선’(Cordon Sanitaire)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상황이 달랐습니다. EPP는 극우 성향 정치단체 ‘유럽을 위한 애국자’(PfE), ‘유럽보수와개혁’(ECR)의 지원을 받아 법안 통과에 나섰고, 실제로 힘을 발휘했습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EPP가 중요 입법 통과를 위해 극우 지지를 의도적으로 활용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며 “방역선이 사실상 무력화됐음을 분명히 보여주는 표결”이라고 평가했습니다. 소피 윌메스 전 벨기에 총리는 “(EPP가) 도덕적 실패를 저질렀다”고 비난했습니다.

로이터 통신은 이같은 변화에 더 깊은 원인이 있다고 분석합니다. 지난해 6월 치러진 유럽의회 선거 이후 극우가 크게 약진하면서 다수파 형성을 위한 ‘보수·극우 연합’ 유인이 늘어났다는 것입니다.

현 유럽의회 의석 718석 중 극우 PfE는 84석으로 EPP(188석), S&D(136석)에 이어 3위 자리에 있습니다. 보수 성향 ECR이 79석으로 그 다음이고, 기존 제3당이던 중도 자유당그룹은 크게 밀려났습니다. 극우 소수 정당 ‘주권 국가의 유럽’(ESN)까지 합하면 극우-보수 계열만으로 유럽의회 과반 형성이 가능합니다.

프랑스 일간 르몽드는 “미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보호주의, 중국의 전례 없는 무역 공세, 유럽의 경제적 둔화”라는 배경을 짚었습니다. 자국 우선주의 강화 흐름 가운데 유럽이 자체 경쟁력 확보를 위해 환경 정책에 제동을 건 측면이 있다는 지적입니다. EU의 양대 국가로 꼽히는 프랑스의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과 독일 프리드리히 메르츠 총리는 일찍이 미국, 중국 대비 EU의 경제적 경쟁력을 약화시킬 수 있다는 이유로 CSDDD 폐기를 주장한 바 있습니다.

외부 압박도 컸어요. 미국과 카타르는 각각 에너지 담당 장관 명의로 유럽과 미국이 올해 체결한 무역합의를 거론하며 “CSDDD가 거의 모든 EU 교역 파트너들과의 무역·투자를 교란할 위험이 있다”고 지난달 비판 서한을 작성했습니다. 토탈에너지스, 엑슨모빌 등 에너지 기업들도 반발 목소리를 냈다고 로이터는 전했습니다.

AFP 통신에 따르면 CSDDD가 마련된 건 2013년 4월 방글라데시에서 발생한 라나 플라자 붕괴사고의 영향이었습니다. 봉제공장이 속해 있던 이 건물 붕괴로 최소 1134명이 목숨을 잃었고, 유럽 각국에선 전세계 공급망에서 이같은 비극이 재발돼선 안 된다는 인식이 퍼졌다고 해요. 그 결과 사건 10년째인 2022년 EU 집행위원회가 제안한 것이 이들 입법이었다는 겁니다.

‘비극을 막자’는 합의는 이제 무너진 걸까요? HEC 파리 경영대학에서 EU법을 가르치는 알베르토 알레만노 교수는 이번 개정안 통과를 두고 “향후 4년간 유럽의회가 규제 완화 중심으로 재편될 것임을 예고하는 중대한 신호”라고 FT에 짚었습니다.

당장 2035년 시행 예정인 ‘내연기관 신차 판매 금지법’도 시험대에 오를 전망이라고 르몽드는 짚었습니다. EPP는 이 법안을 폐기해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유럽의회 리더십에도 변화가 일 것이란 전망이 나옵니다. 테리 라인트케 녹색당 대표는 이번 사태가 “유럽의회를 약화시키는 마비 상태를 초래할 위험이 있다”며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에게도 큰 문제”가 될 수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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