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2차 세계대전을 전후로 미국 중산층은 폭발적으로 늘었다. 당시 시골이나 도시 저소득층 출신의 청년들은 고등학교만 졸업하고도 괜찮은 직장에 들어가 자신의 집을 갖고 평온한 삶을 누렸다. 지금 미국의 흙수저 청년들은 대학 졸업장을 갖고도 취업난과 생활고에 시달린다. 우리나라 현실도 비슷하다. 원인이야 여러 가지지만 두 나라의 공통된 사회 변화상 중 하나가 제조업 일자리 감소다.
J D 밴스 미국 부통령은 자전적 소설 ‘힐빌리의 노래’에서 쇠락한 공업 지역인 오하이오주 미들타운에 사는 백인 저소득층의 비참한 삶을 사실적으로 묘사한다. 밴스의 외할아버지는 철강 회사에 취업해 중산층으로 올라섰고 은퇴 이후에도 기업연금 덕분에 안정된 노후 생활을 유지한다. 하지만 지역 제조업이 쇠퇴하자 마을에는 일자리에 이어 희망마저 사라진다. 밴스의 어머니 역시 이혼한 마약 중독자였다.
‘마가(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운동은 금융 등 서비스업과 첨단기술 자체만으로는 ‘공장’을 대신할 수 없다는 미국인들의 뼈아픈 교훈에서 출발한다. 코로나19 사태 당시에도 한국·일본·독일 등 제조업 수출 국가들은 소비 주도형 국가에 비해 경제적 타격을 훨씬 덜 받았다. 안보 측면에서도 제조업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미국·유럽 등 주요국들은 생산기지 쟁탈전에 국가적 사활을 걸고 있다.
밴스가 강조한 대로 ‘생산 중심의 경제’는 중산층 육성을 위한 핵심 경로다. 제조업이 사라지면 지역 공동체도 무너진다. 먼 나라 일이 아니다. 거제·포항·여수·목포 등 우리나라 남해안 지역은 미국의 ‘러스트 벨트’와 비슷한 처지로 내몰리고 있다. 전국 주요 산업단지에서 조선·철강·석유화학 등과 관련된 기업의 휴업·폐업이 속출하고 청년층이 수도권으로 이탈하면서 고령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이재명 정부는 ‘제조업 4대 강국’을 목표로 ‘거미줄 규제’를 확 걷어내겠다고 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우리 경제의 원천 경쟁력인 제조업의 활력을 떨어뜨리는 정책 일색이다. 더불어민주당은 사업 구조조정 등에 대해서도 파업이 가능하도록 한 노란봉투법, 신속한 투자를 가로막는 상법 개정안 등을 속도전으로 강행했다. 연구개발(R&D) 인력만이라도 주52시간제 대상에서 제외해달라는 경제계의 하소연은 들은 척도 않고 있다. 반면 석화 등 한시가 급한 산업 구조 개편은 사실상 민간 자율에만 맡겨 놓고 있다. 구조조정 과정에서 불거질 근로자·지역사회 등 이해관계자들의 반발을 감당할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앞으로 중국발 공급과잉 등으로 인해 제조업 위기가 심화되면 더 극심한 사회적 충격이 예상되는데도 시한폭탄만 돌리고 있는 꼴이다.
과거 우리 기업들은 제한된 자원을 짜내어 자동차·반도체 등 대형 신사업에 과감하게 도전했다. 그렇게 밤새워 일하며 기술 개발에 매달린 결과 선진국과의 격차를 단기간에 좁혔다. 지금은 이 모두가 파업이나 소송, 법적 처벌 대상이다. 기업들은 생존 차원에서 로봇 도입, 공장 자동화 등을 통해 ‘사람 없는 공장’ 실현에 속도를 내고 있다. 이마저도 여의치 않을 때는 트럼프 관세를 핑계로 국내 공장과 일자리를 해외로 옮기고 있다. 한국판 러다이트(기계 파괴)운동이 일어나고 있는 셈이다.
이런 와중에 이재명 정부가 ‘진짜 성장’의 핵심으로 들고나온 것이 인공지능(AI)·로봇 등 첨단전략산업에 투자하는 국민성장펀드다. 정부 정책 목표에 맞춰 민간 자본을 동원한다는 점에서 녹색성장펀드·뉴딜펀드 등 과거 실패한 관제 펀드와 다를 바 없다. 기업 혁신과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는 생태계 조성은 뒷전인 채 돈만 넣는다고 첨단산업이 성장한다면 어느 나라가 못 하겠는가. 이런데도 ‘국민성장펀드의 투자 성과를 국민들이 공유한다면 세금을 적게 걷고도 복지 재원을 마련할 수 있다’는 식의 장밋빛 환상이나 퍼뜨리고 있다.
굵직한 혁신은 대부분 제조 현장에서 나온다. 제조업체들은 구매처와 소비자·인재·설비 등 네트워크가 한곳에 몰려 있어 시너지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다. AI 분야에서 우리나라의 성장 잠재력이 큰 것도 세계 최고의 제조 역량과 기술력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처럼 기업 달래기용으로 말로만 “규제 혁신” 운운했다가는 정부의 ‘AI 3대 강국’ 구호도 공염불에 그칠 것이다.